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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강타한 ‘재판 거래’ 의혹…논란된 16개 판결 살펴보니

중앙일보

입력

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직원들이 점심시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임현동 기자

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직원들이 점심시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임현동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 후속 조치가 초읽기에 접어든 가운데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인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김 대법원장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된다.

'청와대 협력 사례' 16개 판결 언급 #"'양승태 코트' 문건 부적절" 중론 #'재판 거래' 성사 의견은 엇갈려

최근 재판 당사자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줄 고발이 이어지는 등 ‘사법부 불신’ 기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는 만큼 김 대법원장의 판단에 따라 사법부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어서다. 법원 안팎에서는 사법 거래 의혹에 대한 철저 수사가 진행돼야한다는 주장과 문건의 표현만으로 실제 재판 거래가 이뤄졌다고 단정할 순 없다는 신중론이 맞서고 있다.

앞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25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입법을 놓고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담긴 문건 내용을 공개했었다.

16개 판결 ‘협력 사례’로 적시돼 논란  

이 중 2015년 7월 작성된 ‘현안 관련 말씀 자료(대외비)’ 문건에는 16개의 판결(대법원 15개, 대전지법 1개)이 박근혜 대통령 국정운영의 ‘협력 사례’로 적시돼 있다. 이외에도 같은 해 11월 19일 작성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에는 청와대 ‘압박 카드’의 일환으로 “VIP(박 전 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적혔다. 협조 사례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거법 위반 사건, 김기종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등 3개가 추가 언급됐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특조단은 이 같은 문건이 대법원 판결 이후 협상용으로 작성됐고, 실제 재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이후 김 대법원장이 ‘형사 조치’ 가능성을 시사하고, 특조단이 양 전 원장과 대법관 등을 조사하지 않았다고 한계를 인정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의혹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KTX 해고 승무원 판결 의혹 문건엔…

5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KTX 해고승무원들과 대책위 회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청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 제공=연합뉴스]

5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KTX 해고승무원들과 대책위 회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청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 제공=연합뉴스]

문건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KTX 해고 승무원 소송 사건이다. 코레일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된 승무원들은 1·2심 복직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2015년 2월 26일 대법원은 “KTX 승무원은 코레일의 정규직이 아니다”는 취지로 원심을 깨 파기환송했다.

문건은 박근혜 정부의 ‘4대 부문 개혁’ 과제 중 가장 시급한 부분을 ‘노동 부분’이라고 규정한 뒤 “노동 부문의 선진화와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 시장의 유연성 확보, 바람직한 노사 관계의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며 그 사례로 이 대법원 판결을 들었다.

이후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2015년 11월 승무원들의 패소 확정판결을 내렸다. 일각에선 이 문건이 파기환송심 이전에 작성된 만큼 대법원뿐 아니라 파기환송심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의혹을 제기한다. 해고 승무원들과 대책위 관계자들은 지난달 29일 대법원 대법정에 진입해 항의의 뜻을 밝히고, 대법원장 면담도 요청한 상태다.

재판 전 작성된 ‘전교조 문건’

2017년 7월 3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3일 오후 서울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외노조 쵤회를 주장하는 3000배를 하는 모습. 장진영 기자

2017년 7월 3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3일 오후 서울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외노조 쵤회를 주장하는 3000배를 하는 모습. 장진영 기자

문건에 또 다른 ‘협력 사례’로 제시된 전교조 법외노조 대법원 판결(2015년 6월 3일)은 판결 이전에 작성된 법원행정처 대외비 문건 때문에 논란의 불씨가 더 커졌다. 2014년 12월 작성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이다.

2013년 고용노동부는 해직 교사들이 활동하는 전교조를 합법 노조로 볼 수 없다며 법외노조 통보를 했다. 이후 2심 재판부가 전교조 측 주장을 받아들여 이 같은 처분 효력을 정지시키자 고용노동부는 재항고했다. 이때 법원행정처의 한 심의관이 이 문건을 작성한 것이다.

문건에는 “재항고 기각 시 상고법원 입법추진에 대한 청와대의 방해가 있을 것이고, 인용시 양측(대법원과 청와대)에 모두 이득이 될 것”이라는 등 예상 시나리오가 포함됐다. 실제 2015년 6월 대법원은 재항고를 인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실제 시나리오대로 판결이 난 것이 제판 거래 때문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다른 쪽에서는 “시나리오 문건과 결과만 가지고 재판 거래가 이뤄졌다고 예단해선 안 된다”는 신중론도 나오는 상황이다.

문건에는 이외에도 악기 제조업체 콜텍 해고 사건에 대해 “사측의 정리해고가 유효하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결, 진도군 민간인 희생 사건(1948~1952년)에 대해 “과거사정리위의 보고서만 믿고 국가배상을 해선 안 된다”고 판단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 등이 ‘양승태 코트’의 청와대 협력 사례로 적시됐다.

‘재판 거래’인가 부적절 ‘문건 작성’인가

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재판거래' 의혹 등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중앙포토]

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재판거래' 의혹 등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중앙포토]

양 전 원장 시절 이처럼 ‘재판 거래’를 의심케 하는 문건이 작성된 것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위신을 추락시킨 부적절한 행위”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하지만 실제 재판 거래가 성사됐느냐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부 대법관들은 최근 김 대법원장에게 재판 거래 의혹이 불쾌하다는 취지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 지방법원 판사는 “문건에 나오는 표현들이나 작성 시점을 보면 실제 재판에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고법부장 판사는 “문제의 ‘문건 작성’과 ‘재판 거래’는 구분해야 한다. 적어도 법원 구성원은 재판 거래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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