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트럼프와 담판 직전 중국 러시아 지원 다지기 나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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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면담 후 미국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확정했다. 김영철은 이 자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김영철의 차량 앞까지 나와 배웅하며 ‘예우’ 했다. 이전까지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확정하지 않았던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과의 면담에 만족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을 거쳐 4일 귀환한 김영철은 김 위원장에게 미국 방문 결과를 자세히 보고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중국에도 관련 내용을 상세히 전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8일 중국대련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8일 중국대련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관심을 끄는 건 미국과 정상회담을 앞둔 김 위원장의 대외 행보다. 지난달 26일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김 위원장은 이후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지난달 31일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난 게 공개활동의 전부다. 그래서 그가 ‘세기의 담판’인 북ㆍ미 정상회담 준비에 전력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국가의 명운을 거는 분위기”라며 “어느 회담보다 신경을 쓰고, 철저히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철의 방미 결과는 물론 판문점에서 벌이고 있는 북·미 실무접촉 상황을 꼼꼼히 챙기면서 본게임(북ㆍ미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김 위원장은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현지지도 등 대내 활동을 멈추고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다 중국을 찾았다. 3월 25일부터 나흘간 진행한 중국 방문은 그의 집권 후 첫 해외 방문인데 그동안 냉랭했던 양국관계를 복원하고 중국의 후원 약속을 받아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북·중 관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5월 9일) 직전 중국 다롄(大連)을 찾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2차 정상회담을 했다. 큰 이벤트를 앞두고 혈맹인 중국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는 행동의 반복이다. 정부 고위당국자 출신 한 소식통은 “북한은 ‘작은 나라가 미국과 맞서고 있다’고 강조하며 중국의 지원을 요구하곤 했다”며 “혈맹의 끈을 든든히 한 뒤 북·미 정상회담에서 강하게 나갈지, 눈치를 보며 양보를 할지 판단하는 전략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북ㆍ중 정상회담에선 시 주석이 “북·미 대화와 관계없이 북한이 비핵화에 나선다면 전폭적인 지원을 할테니 당당하게 회담에 임하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중앙일보 5월 18일자 2면 참조>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달 24일 정상회담 취소 서한을 공개하기 직전 “김 위원장이 시 주석을 만난 뒤 변했다”는 말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1일 당일치기로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1일 당일치기로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미국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 러시아 등과 혈맹 다지기를 반복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과 홍콩에선 오는 9일을 전후해 북ㆍ중ㆍ러 정상회담이 중국 칭타오(靑島)에서 열릴 것이란 얘기가 돈다. 또 북ㆍ중ㆍ러 정상회담 기간중, 또는 이를 전후해 북ㆍ러 정상회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는 분위기다. 정부 당국자는 “지난달 31일 라브로프 외무장관 방북 직후 북한 언론들이 북ㆍ러 정상회담 합의 소식을 전했다“며 “양국이 회담 날짜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상황에 따라 미국과 정상회담에 앞서 북ㆍ러 정상회담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지난달 10일 이용호 북한 외무상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담을 했는데 한 달여 만에 당일치기로 방북했다. 이때문에 라브로프 장관의 방북은 한반도 문제에 목소리를 내길 희망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조율 때문이었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ㆍ중ㆍ러 또는 북ㆍ러 정상회담이 12일 이전에 열릴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반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중국이나 러시아의 목소리를 달가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은 “지난달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서한(북·중 정상회담 취소)을 통해 판을 흔든 건 중국 털어내기의 일환일 수 있다”며 “북한은 미국과 대화를 하면서도 보험용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또는 양국의 자본 유치를 염두에 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럴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예정된 정상회담에 임할지, 또 다른 방식으로 판을 흔들지 주목된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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