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가 나서 "납기일 맞춰주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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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현대중공업노조(이하 현중 노조)는 오랫동안 강성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1990년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 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인 이른바 '골리앗 투쟁'은 이후 다른 노조의 투쟁 모델이 됐다.

현중 노조는 그러나 2002년 투쟁 노선을 버리고 노사 상생의 합리 노선을 추구한다. 이어 현중 노조는 2004년 9월 민주노총에서 제명됐다. 이 회사에서 자살한 비정규직 직원을 '열사'로 대접하지 않았고, 투쟁도 머뭇거린다는 이유다. 제명된 현중 노조는 독자 노선을 선언했다. 그 뒤 1년7개월이 지났다. 현중 노조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13일 오후 찾아간 울산시 동구 전하동 1번지 현대중공업 노조 사무실에는 '쟁취하자' '타도하자'는 따위의 붉은색 벽보나 플래카드가 어디에도 없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대기업의 연구소 분위기다.

강맹용 노조 부위원장은 "예전엔 여기도 빨간색 천지였다"고 말했다. "무슨 자재창고 같았는데 6개월 걸려 바꿨다"고 덧붙였다.

노조 기획부 책상 위에 있는 올해의 사업기획안이 눈에 띄었다. '조선산업 발전전략 연구사업 추진 내용' '사회적 참여 실천계획서' '아름다운 (울산)동구 만들기 자원봉사활동 프로그램 기획안'. "노조에 왜 이런 게 필요하냐"고 물었다.

안동근 노조 기획부장은 "조선사업은 지금 유례없는 호황이지만 이게 언제까지 계속될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 노조의 목표는 "앞으로 후배 조합원들에게도 성장하는 회사를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중 노조는 이를 위해 조선산업의 발전전략을 연구하고, 중장기 계획도 수립 중이다. 연말까지 노조.회사.전문가 등으로 꾸려진 연구진이 보고서를 내놓을 계획이다.

김종욱 현대중공업 경영지원본부 이사는 "노조가 선박 발주회사에 '공사 기일을 맞추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보증각서를 써주고, 발주한 회사에 노조위원장 명의로 감사편지도 보낸다"고 귀띔했다.

선박을 발주한 회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파업으로 배가 제때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노조가 보증각서까지 써주니 발주회사들은 마음 놓고 계약을 한다고 한다.

조선업의 호황 덕분이기도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올해 매출액을 12조6000억원으로 잡고 있다. 지난해보다 22.6%나 늘어난 것이다.

현중 노조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주민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현중 노조는 60억원을 들여 종합휴양소를 만들 계획이다. 과거에는 매년 상급단체에 의무조합비 6억원을 내고 투쟁비로 쓰는 액수도 5억원이었다. 이젠 이 돈을 모아 다른 일에 쓴다. 김성호 노조위원장은 "상급단체(민주노총)가 없어 고립됐다고 하는데 우린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 노동해방은 조합원이 지역 주민과 함께 살아갈 때 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중노조는 어용노조가 아니다. 실질적으로 조합원들의 권익이 걸린 문제들에 대해선 회사 측과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종욱 이사는 "조합원의 처우개선에 대해서는 노조가 줄기차게 요청한다"며 "하지만 수시로 대화하기 때문에 갈등이 불거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현중 노조는 올해 초에는 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함께 방글라데시를 방문해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신발 등을 전달했다. 지역 내 혼자 사는 노인들을 초청해 문화행사를 열었고, 장애인 지원 활동을 펴기도 했다. 현중 노조는 '지역사회를 돕는 것은 기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노조도 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 있다.

정용환 울산동부경찰서장은 "노조의 시위를 막는 데 투입했던 경찰력을 주민 치안으로 돌릴 수 있게 됐고, 범죄율이 줄고 있다"고 말했다.

현중 노조가 올해 펴낸 새내기 조합원 교육용 책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회사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투명하지 못한 경영도 철저히 견제.감시한다. 지금은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노사불이(勞社不二)를 선언했다."

울산=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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