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적 갈등 극복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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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독일의 철인 「프리드리히·니체」(1844∼1900년)는『신은 죽었다』 는 하느님 사형선고를 내린 일이 있다.
오늘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데올로기는 이미 사라졌다』 는 이념적 갈등의 종언을 고한다. 이를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해주는 단적인 예가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다소의 정략적 의도가 있었을 지는 모르지만「7·4 공동선언」「7·7선언」이 바로 그 웅변적인 증거다.
동서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원숭이로부터의 진화를 증거 해주는 인간의 꼬리뼈 (미골)처럼 굳건히 남아있을 것 같던 한반도의 지진아적 이데올로기 대림이 이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 줄이야 감히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가 싶다.
원래 이데올로기란 「유토피아성」을 갖는다. 실현할 수 없는 이상향을 그리는 꿈이야말로 언제나 달콤할 수밖에 없다.
행동과 결단의 밑받침이 되기도 하는 이데올로기는 그래서 역사의 진전을 가져오려는 온갖 혁명과 운동의 나침반이 돼왔다.
영원한 꿈인 이데올로기를 휘어잡고 허우적거려 온 8·15해방이후 우리의 40여년 역사는 이제 「꼭두각시놀음」의 허무로 그 종막을 내리려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사람들과 소련·중국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가장 적대시 해왔고 증오했다. 이 같은 사실은 그 동안 국내외 여러 조사에서 누누이 밝혀졌던 해묵은 이야기다.
특히 북한의 경우는 40여년 동안 이데올로기의 「노예생활」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념적 장벽은 이른바 선진국을 자처하는 서구나 미국·일본 등에서는 무너지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공산당을 합법 정당으로 인정했고, 동경역 앞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확성기로 외쳐대는 공산당원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해도 전혀 공산화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경험적 교훈을 얻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성이 갖는 매력은 인류가 이상을 버리고 살아온 적이 없는 것처럼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억압이나 서슬 시퍼런 법령만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막을 수도 없고 오히려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싶은 충동만을 일으킨다.
우리의 경우도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유신이후의 반체제항쟁 시절이나 최근의 개방화 물결 속에서도 금기시하고 있는 소위 「좌경서적」의 범람과 탐독이 바로 그 좋은 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22%가 금서인 「마르크슨 의 『자본론』 을 탐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재야·학생운동권 등에서는 갖가지 사상서적들을 필독서로 삼고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자본론』을 읽은 학생들의 반응에서는 『영향을 받았다』(찬성)와 『이해할 수 없었다』(반대)가 각각 11%씩 팽팽했다.
이쯤 되면 자신을 가질 수도 있다. 또 소박한 악관일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우리 남한사람들 대부분은 이 같은 「자신」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따라서 활화산 같은 열기를 뿜고 있는 오늘의 통일논의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문제도 개방된 사회의 「경험」을 통해 극복하는 길이 가장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소년들의 무지개 빛 꿈은 오히려 많은 사상서적을 읽고 경험을 쌓는 나이테(연륜) 속에서 이상과 현실의 일치하지 않는 틈새를 깨닫는 어른으로의 성장을 기다려야 한다.
인간에게는 다소 청개구리의 심리가 있어 못 읽게 하는 책은 더 읽어보고 싶고 못 먹게 하는 과일은 더 먹고 싶게 마련이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과일을 따먹고 하느님을 반역한 씻지 못할 원죄를 지은 것도 바로 이런 「청개구리 심리」를 못 버리는 인간의 속성이 아닐까.
선진국 치고 이데올로기를 아직도 그처럼 신주 모시듯 하는 예는 없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적대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두 사회구조사이의 대립 속에서 서로 싸우며 갈등을 겪어왔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적 집단주의의 대립으로 요약되는 인류 이데올로기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같은 대림과 갈등은 공산국가들에서도 민주·자본주의적 체제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함으로써 과거와 같은 냉전의 장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올바른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오랜 동안 해온 경험으로부터 확고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겁을 먹는다면 이는 그 동안 올바른 민주 자본주의를 안 해왔다는 역설이 된다.
이제 우리는 「자신」 을 갖자.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고하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공동체 형성의 울력(협동)에 나서자.
누가 뭐래도 우리 한국인은 공산주의로는 살아가지 못할 체질을 다지면 된다.
소련도 중공도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등 자본주의적인 삶의 질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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