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신상옥 스토리를 '찍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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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국의 신상옥에서 세계의 신상옥으로-. 11일 타계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이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진다. 20세기 한국 영화계의 최고봉이었던 신 감독의 육신은 갔어도 그의 예술혼은 길이 남게 됐다.

12일 신 감독의 서울대 병원 빈소에는 할리우드의 저명 제작자인 베리 오스본(작은 사진)의 조화가 놓여 있었다.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페이스 오프' 등을 만들었던 오스본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프로듀서. 현재 뉴질랜드에서 '워터호스'를 찍고 있는 그는 12일 한국의 보람영화사 이주익 대표로부터 신 감독의 부음을 듣고 '거장'에 대한 애도를 표시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이 대표와 함께 신 감독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를 준비해왔다.

이 대표는 "그간 신 감독과 여덟 차례 만나 영화 제작에 합의했다. 신 감독께서 갑자기 타계해 안타깝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고인에게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부인 최은희씨도 "남편께서 살아계셨다면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을텐데…. 남편의 삶을 돌아보는 영화가 나온다는 건 고인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께 촬영에 들어갈 영화는 영어로 만들어진다. 한국.미국 공동제작 형식이다. 1차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이 대표는 "고인이 생전 시나리오 초고를 읽어봤다. 현재 미국 작가들이 최종 손질 중"이라고 설명했다. 제작비는 3000만 달러 안팎(약 300억원)으로 예상된다. 할리우드의 '중간급 대작'에 해당된다.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주요 배우는 한국에서 맡는다.

이 대표는 "한국과 북한,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했던 신 감독의 행보를 따라가는 만큼 로케이션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영화에 대한 지독한 애정, 자유를 향한 절박한 몸짓 등 신 감독의 일생은 세계 영화인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영화는 오직 영화밖에 모르고 살았던 신 감독의 예술혼에 초점을 맞춘다. 납북.탈북 등 민감한 사항에 대한 해석을 지양하고 자유를 모토로 삼았던 '영화인 신상옥'을 고루 조명할 작정이다.

이 대표는 합작영화 등 한국영화의 국제화에 노력해왔다. 영화배우 박중훈의 할리우드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개막작인 '칠검'을 한국.중국.홍콩 합작으로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 특수효과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베리 오스본과 함께 올 연말 무협 팬터지 '사막전사'(감독 이승무) 촬영을 시작한다.

고인은 납북 직후 북한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때 예전의 작품을 일일이 기억해 머릿속으로 재편집했다. 고인은 회고록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재평가(머릿속 편집)를 하는 동안 나는 다시 환상 속에서나마 '영화에 미친 놈'이 또 되고 말았다. 정말 몇 년 만에 행복한 미치광이가 다시 될 수 있었던가…"라고 밝혔다. 이제 이승을 떠난 고인이지만 영화화 소식에 행복해할 듯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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