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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공천장사 정찰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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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 비리로 검찰에 고발당한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오른쪽)이 13일 긴급의원총회에서 신상발언을 한 뒤 박근혜 대표에게 인사하고 있다. 김 의원은 신상발언에서 사실상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오종택 기자

한나라당이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5.31 지방선거를 불과 40여 일 앞두고 터진 돈 공천 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차떼기 정당'의 오명(汚名)을 벗기 위해 2004년 3월'천막당사'로 들어간 지 2년여 만에 벌어진 상황이다. 당내에선 "썩어도 너무 썩었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다니…"라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은 "돈 공천 자기고백은 비리 척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국민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김덕룡(4억4000만원).박성범(21만 달러.모피코트.고급양주) 의원의 금품 수수 의혹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13일 "당에서 출당조치해도 달게 받겠다"며 "당에서 하지 않으면 내가 조만간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당이 나를 고발했는데 당에 남아 조사를 받을 수 없다"며 탈당 의사를 밝혔다.

◆ 끊이지 않는 돈 공천 잡음=12일엔 대구의 곽성문(중.남구) 의원 측에 금품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은 대구시의원 출마 예정자가 구속됐다. 곽 의원도 검찰의 소환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역 신문들은 곽 의원이 출마 예정자들로부터 여행 경비 등 금품과 술자리 향응을 제공받았고, 받은 돈의 일부를 조상 분묘를 단장하는 경비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검찰이 추적 중이라고 보도했다. 경기도 용인의 한선교 의원도 공천 신청자로부터 받은 골프 접대 때문에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허태열 사무총장은 이날 "김.박 의원 외에 추가로 현역 의원이나 원외인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예전 지구당위원장)이 관계된 5~6건에 대한 자체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조사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이번 사건처럼 큰 사건으로 불거지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당 지도부도 제2, 제3의 공천 헌금 파문이 터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당내에선 "조사 대상엔 서울지역 현역의원 두 명이 포함돼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서울지역 외에는 K.L.J 의원의 이름도 오르내린다.

익명을 요청한 한나라당 중앙당 공천심사위원회의 한 위원은 "김.박 의원 외에도 8명 정도가 비슷한 금품수수 의혹을 받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고 말했다.

◆ "공천 헌금 액수는 공공연한 비밀"=3월 초 출범한 한나라당 '클린공천감찰단'에는 100건이 넘는 공천 비리 제보가 접수됐다. 공천 헌금과 관련된 각종 유형의 투서와 제보가 밀려들어와 일일이 혐의를 확인하기조차 힘들 정도라고 한다.

한나라당 아성인 영남지역에선 공천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금품 액수가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돌고 있다. 경남의 한 지역에선 "기초의원 1억~3억원, 광역의원은 3억~5억원, 기초단체장 공천엔 10억~15억원이 정찰가"라는 이야기가 출마 희망자들 사이에 돌았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의 증언이다.

출마 희망자들이 이곳을 찾은 당 관계자들에게 "그 액수를 주면 정말로 공천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코미디까지 빚어지고 있다.

◆ 만연한 '도덕 불감증'=공천 과정에서 현역의원이나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들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그래서 이들을 상대로 한 로비가 치열하다 보니 '도덕 불감증'이 만연한 상태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과 전 보좌관, 운전기사를 지낸 비서, 홍보물 기획자 등 측근 5명을 광역.기초 의원에 무더기로 공천하려다 잡음이 일어 당 차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

마포구청장 공천에선 서울시 공천심사위원이 출마 희망자와 술자리를 함께한 사실이 드러나 당 사무처 노조의 거센 반발을 샀다. 한나라당 게시판은 "낙천자 착수금이 이 정도인데 당천자 사례금은 얼마냐, 공천을 전면 백지화하고 시민에게 맡겨라"는 등의 투서와 비방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기재 노원구청장 등 공천 탈락에 반발해 탈당하는 사례도 줄을 잇고 있다.

◆ 예고된 사고=유독 한나라당에서만 공천 헌금 파문이 터진 것은 한나라당 공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남과 수도권 등 한나라당 강세지역에서는 '공천=당선'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열린우리당의 낮은 지지율도 원인이 됐다. 이런 선거구도 때문에 한나라당 공천시장은 공급 과잉 현상이 빚어졌고,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공천 헌금을 갖다 바쳐야 하는 구태가 재현됐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당 관계자는 "기초자치단체장은 실질적으로 국회의원보다 많은 권한을 갖고 있어 영남과 수도권의 웬만한 지역에서는 과열양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상연.서승욱 기자 <choisy@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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