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울린 한국의 춤사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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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젊은 심청을 에워싼 흰 옷의 춤꾼들이 느린 곡선의 유려한 몸짓으로 아비를 위해 몸을 던지려는 딸의 슬픔을 표현하자 유럽 관객은 '춤으로 듣는 소리'라며 환호했다.

무대엔 길이 놓여져 있었다. 흰 천으로 만들어진 길은 좁다란 무대를 훌쩍 벗어나 굽이굽이 객석을 휘감았다. 때론 춤꾼이, 때론 창자(唱者)가 길을 따라 객석에서 툭 튀어나올 때면 유럽의 유서 깊은 극장은 어느새 우리네 살가운 놀이마당이 돼 버렸다. 심청이 몸을 내던진 건 인당수가 아닌 낯선 이방인들의 가슴 한복판이었다.

한국 전통무용의 현대화를 이끌고 있는 창무회(이사장 김매자)의 창작 무용 '심청'이 유럽을 적셨다. 13일(한국시간) 프랑스 리옹의 '메종 드 라 당스(무용의 집)'는 심청의 눈물과 환희로 뒤범벅됐다.

25년 역사의 유럽 최초 무용 전용극장인 메종 드 라 당스는 윌리엄 포사이드.마기 마랭.머스 커닝햄 등 세계적인 안무가의 작품만 올리는, 전 세계 무용인의 꿈의 무대.

이날 공연은 한국 창작무용이 해외에서 거둔 가장 값진 성과로 평가된다.

5장으로 구성된 작품엔 뺑덕어미가 없다. 심청은 어린 심청, 젊은 심청, 왕후 심청 등 무려 세 명이 차례로 등장했다. 이야기에 얽매이기보다 각 인물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대목에서 무용 '심청'은 고전의 굴레를 털어냈다.

1000석이 조금 넘는 객석을 촘촘히 채운 푸른 눈들은 17인 무용수의 몸놀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늘을 찌르기보단 팔을 감싸안으며 땅에 엎드리고, 발끝은 곧추세우기보단 뒤꿈치부터 내려놓는 걸음새에 신기해 했다. 전 출연진이 다리를 벌린 채 털썩 주저앉는 마지막 장면. 불이 꺼지자 극장은 박수로 뜨거워졌다. 커튼 콜은 10여 분간 이어졌다.

낯선 소재의 한국무용이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전통의 현대화'다. 창무회는 출범 이후 30년간 전통무용의 현대화, 전통공연(탈춤.범패)과 현대무용과의 조화를 추구해 왔다. 이번 심청에서도 핵심은 판소리와의 조우였다. 피가 끓듯 토해내는 절절한 소리는 2시간 내내 무대를 장악했다. '춤으로 듣는 소리, 소리로 보는 춤'이란 부제처럼 생생히 드러낸 소리꾼과 고수의 모습에서 공연은 무용과 국악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심청을 초청한 메종 드 라 당스의 기 다르메 극장장은 "세계 최고 수준 무용단이라도 단원들은 마치 회사 직원 같다. 그러나 김매자와 그의 단원들은 생활양식도 비슷하며, 철학도 서로 일치한다.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프로그래머 벤자민 페르셰는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문화만큼은 각각의 고유성을 간직해야 하며, 심청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다"고 언급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옹(프랑스)=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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