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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DJ와 오부치에겐 있고, 문재인과 아베에겐 없는 것

중앙일보

입력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제대로 읽어보면 선언을 기념할 게 아니라 그냥 실천하면 된다. 실천만 해도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심규선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기금 교수)

게이오대 세미나서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년' 논란 #문 대통령ㆍ아베 "김대중 오부치 정신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서로 패싱하고 무시하는 한ㆍ일 #"양국 지도자,DJ의 여유와 오부치의 배려심 없어"지적

19일 오후 일본 도쿄의 게이오(慶應)대 미타(三田)캠퍼스에서 열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한·일 협력’세미나 도중에 나온 발언이다.

19일 도쿄 게이오대 미타 캠퍼스에서 열린 세미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한일협력'에서 북한 핵 문제와 한일 안보협력 방안을 놓고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19일 도쿄 게이오대 미타 캠퍼스에서 열린 세미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한일협력'에서 북한 핵 문제와 한일 안보협력 방안을 놓고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게이오대 현대한국연구센터와 양국 학자ㆍ전문가들 간 네트워크인 '세토(SEOUL-TOKYO)포럼'이 공동주최한 세미나의 주요 테마는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과정에서 한·일 양국이 어떻게 협력할지였다.

그런데 발제자들 가운데 “1998년에 발표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 20주년을 맞은 올해를 양국 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니시노 준야 게이오대 교수)는 주장이 나오자 심 교수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양국 정치 지도자들이 주장하듯 20년전의 선언을 기념하거나 새로운 선언을 발표하겠다고 요란을 떨 게 아니라 기존의 선언을 제대로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19일 도쿄 게이오대 미타 캠퍼스에서 열린 세미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한일협력'에 100명 가까운 참석자들이 몰려들었다. 서승욱 특파원

19일 도쿄 게이오대 미타 캠퍼스에서 열린 세미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한일협력'에 100명 가까운 참석자들이 몰려들었다. 서승욱 특파원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최근들어 부쩍 김대중(DJ)-오부치 선언 20주년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자 요미우리 신문 인터뷰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의 해법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 이를 계승ㆍ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아베 총리 역시 지난 15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경제인회의에서 “파트너십 선언 20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습을 검토하도록 문 대통령과 함께 양국 당국에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저출산고령화와 에너지·환경 문제 등 미래의 공통 과제에 대한 협력을 포함해 새로운 양국 관계의 비전을 담을 선언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로는 ‘지난 20년 보다 새로운 20년’,‘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운운하지만 실제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위안부 합의 재검토를 둘러싼 후풍폭속에서 올 초 한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자 일본은 “왜 모두가 대북 압력을 주장하고 있는데, 한국만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느냐”고 한국 패싱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지난 2월 9일 오후 평창 블리스 힐 스테이트에서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지난 2월 9일 오후 평창 블리스 힐 스테이트에서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후 남ㆍ북ㆍ미 간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엔 한국이 “미국만 믿고 압박 운운하더니 꼴 좋다”며 일본 패싱을 은근히 즐겼다.

지도자들은 겉으로 ‘한ㆍ미ㆍ일 연계’를 말했지만 서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점점 더 고조돼왔다.

심지어 지난 15일 발표된 외교청서에서 일본의 아베 정부는 지난해까지는 있었던 “한국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라는 표현까지 삭제했다.

대신 “양호한 일ㆍ한 관계는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있어 불가결하다”,“한국과의 연계와 협력은 아ㆍ태지역 평화와 안정에 불가결하다”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필요한 존재’정도로 한국을 묘사했다.

그렇다면 20년전에 발표된 한·일 파트너 선언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도쿄 영빈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21세기 새 시대를 위한 공동선언'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중앙포토]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도쿄 영빈관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21세기 새 시대를 위한 공동선언'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중앙포토]

1998년 10월 발표된 선언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돼온 양국 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다",“20세기의 한·일 관계를 마무리하고 진정한 상호이해와 협력에 입각한 21세기의 새로운 파트너십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불행했던 20세기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의 발전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중인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도쿄 (東京) 영빈관에서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중인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도쿄 (東京) 영빈관에서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와 그로 인한 손해와 고통의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고, DJ는 이를 평가하며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밝혔다.

11개항의 선언문과 함께 채택된 행동계획까지 포함하면 무려 1만4700여 자 분량이다.

행동계획에는 ▶정상회담의 연 1회 정례적 실시▶초임 외교관의 상호 파견 등 연수 교류▶한국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기여와 역할이 증대될 것을 기대▶안보정책협의회 등 방위교류 확대▶대북정책에 관한 정책협의 강화 등 지금의 한·일관계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내용들도 포함돼 있었다.

심 교수는 게이오대 세미나에서 “선언이 가능했던 건 상대방에게 더 이상 사과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는 DJ의 여유, 또 한국이 요구하지 않아도 사과할 수 있는 오부치 총리의 배려심, 지도자로서 두 사람의 그릇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며“지금 양국의 두 지도자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기념할 만한 배포와 여유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일본 도쿄 총리공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오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부터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축하 케이크를 받은 뒤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일본 도쿄 총리공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오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부터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축하 케이크를 받은 뒤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공허하고 막연한 계승ㆍ발전론으로 호들갑을 떠느니 만들어져 있는 선언이라도 제대로 지키는 일, 아니면 최소한 지키려는 마음가짐이라도 갖는 일이 지금의 두 지도자에겐 더 중요한 것 같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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