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도 「민주화 바람」 |프렘수상 「전격은퇴」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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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태국 군부와 민간정치세력사이에서 중재자로 평가받으며 8년간 장기집권해 온 「프렘· 틴술라논다」수상의 전격적인 정계은퇴선언은 숱한 군부쿠데타로 얼룩져 온 태국정국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것 같다.
총선결과 하원의석 3백57석중 87석의 의석을 차지하여 제1정당으로 떠오른 태국국민당과 사회행동당, 민주당등 5개 연립정당들은 2백15석의 의석을 장악, 「프렘」수상에게 연임을 제안했으나 「프렘」은 제의를 수락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이번 총선은 지난 4월미국의 저작권을 보호하기위한 법안의 하원통과틀 둘러싸고 연정내부가 분열, 각료 16명이 사임한 것을 이유로 의회를 해산하면서 빚어졌다. 당초 의회를 해산할 때는 정치적 긴장을 해소, 자신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 분명했기때문에 그의 사의표명은 예상 못했던 일이다.
「프렘」의 사퇴를 놓고 정치분석가들은 그 원인을 크게 두가지로 분석하고 있는데 첫째,정당에 소속돼 있지않고 의회경력이 전혀없는 수상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학생·야당지도자들의 반프렘 데모가 거세어지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학생시위는 지난 4월29일 의회해산 후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지난 27일밤에는 3천여명의 학생시위대가 그의 관저부근에서 시위를 한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둘째이유로는 군최고지도자인 「차발리트」육군총사령관의 군중립선언으로 「프템」의 지지기반이 상실된 것을 꼽고 있다.
다른 제3세계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국의 정국을 주도하는 핵심세력은 정치체계에 의해 『관료화』된 군부세력이다.
태국의 정국은 지난 1932년 쿠데타에 의해 절대왕정이 무너진 이래 15차례의 쿠데타로 얼룩져 왔으며 이기간 동안 소수의 군부와 관료 엘리트들이 정치를 지배해 왔다.
지배엘리트들은 수적으로 한정돼 있고 이들간의 세력·경쟁을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현상을 보여왔다. 이런 측면에서 「프렘」의 군부 지지기반 상실은 곧 그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그는 7월 l5일 외신기자회견에서 후보로 출마하지는 않지만 요청을 받는다면 다시 수상직에 오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며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변화는 이러한 두가지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프렘」은 지난 80년 3월 12일 취임이래 군부 및 관료, 자본가, 국왕등 지배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아 지난 81년과 85년 9월의 군부 쿠데타로 정국이 혼미에 빠졌을때도 위기를 수습, 계속 집권해 왔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우유부단하고 타협심이 부족하고 국가문제처리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들어왔지만 그의 재임기간동안 미국, 아세안(ASEAN)과의 관계유지와 외국인 투자유치등 일련의 경제정책을 펴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 태국을 새로운 아시아 신흥공업국 문턱까지 부상시키는등의 경제적 토대를 닦았다.
버마의 「네윈」장군에 의한 철권정치와 경제실패로 인해 버마정국이 호구를 거듭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때 그 나름대로 평가받을 업적을 마련하기는 했다.
그러나 군부를 등에 업은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은 결국 그의 퇴진으로 이어질수 밖에 없었다. 최근 수년동안 필리핀·한국·대만에서 일고 있는 민주화과정이 태국국민들의 기대감에 영향을 준면도 적지 않은것 같다.
일단 인물교체라는 점에서 「차티차이」의 등장은 폭넓은 민주화의 가능성을 엿보이게 했다는데서 평가받을수 있겠으나 그가 「프렘」과 같은 성향의 군부출신이라는 점에서 학생과 야당세력이 언제까지 승복할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조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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