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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19. 조부의 DNA<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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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당대에 거부가 된 개성상인이었던 할아버지 방영식(左)씨와 할머니 박순창씨.

나는 석가모니.예수는 몰라도 유전자는 믿는다. 타고난 성정이 따로 있고, 그게 사람을 좌우한다고 믿는것이다. 내 몸에는 두 개의 DNA가 흐른다. 증조부가 남겨준 '망종의 DNA', 그리고 당대에 거부가 된 개성상인 할아버지의 DNA다.

우선 증조부. 그는 망종 중의 망종이었다. '망종'이라는 표현이 조상에 대해 예의바르지 못한 표현인 줄은 알지만 집안 어른들도 그 분을 그렇게 불렀기에 그대로 따라본다. 그의 노름 행태와 싸움질에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고향 분들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고 한다. 내 고향 개성은 신용사회로 유명한 곳이다. 어떤 질 나쁜 사람이 약속한 기간 안에 빚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는 '아무개 빚이 얼마'라고 쓴 깃발을 자기 집 대문에 내걸었다. 그게 정초의 풍속이었다.

신용불량자 공개 망신 작전인데, 해마다 정초면 고향 마을 집집마다 증조부 이름이 걸리지 않는 곳이 없자 머리 굵은 맏아들인 나의 할아버지(방영식)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집안은 지독스레 가난한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밭뙈기 한 뼘 없는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날품팔이 생활에 나서야 했다.

15세 신랑과 결혼한 조모께서는 저녁이면 빈 솥단지에 물을 붓고 군불을 때 저녁 연기를 올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끼니를 건너 뛰지만 "우리는 굶지 않아요"라고 시위하듯 산 것이다. 그게 일제 초기인 1910년대 중반. 할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을 동경했다. 그의 목마름은 고향 탈출 시도로 나타났다.

대륙 저쪽에서 소비에트 혁명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1917년 혁명은 배운 것 없던 그에게도 귀가 번쩍 뜨이는 뉴스였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농민.병사의 나라다"라는 소비에트 헌법 제1조에 매료됐다고 한다. 거의 100년 전 일제시대의 답답함 속에서 혁명의 불길은 훨씬 커보였던 것이었으리라.

그는 평등 세상에 대한 기대와 목마름으로 고향을 떠났다. 부엌의 큰 솥단지를 떼어 팔아 노자를 마련해 무작정 북쪽을 향해 길을 나섰다. 천지 개벽의 진원지를 향해 내딪은 청년의 힘찬 발걸음이었다. 나는 지금도 할아버지의 그같은 결단에 전율을 느끼곤 한다.

훗날 내가 자급자족과 공동체 운동을 위해 노나메기 농장일에 힘을 쓸 때 할아버지의 DNA를 자주 떠올렸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내게 영웅이다. 하지만 그분은 며칠 못가 붙잡히고 말았다. 증조부의 추적 때문이었다. 한반도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덜미를 잡혔다. 변화는 그때부터 일어났다.

지옥 같은 가난 속으로 복귀했지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탈출의 에너지를 집안 일으키기에 쏟았다. 우선 장돌뱅이로 변신했고, 남의 집 9년 고용살이를 거쳐 모은 육전(肉錢, 밑천)을 크게 번창시켜 30년대에 개성 부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당시 신상(紳商, 신사상인) 소리를 들었던 그가 남긴 일화들은 놀랍기 그지없다. 개성상인다운 지독한 근성은 내일 전해드리겠지만, 타고난 건강에 몸까지 날래 발차기에 귀신이었다고 한다. 근대 산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푸른 색 컨버터블 승용차를 타고 다녔던 것도 할아버지의 성공 덕이었다. 나의 힘자랑 습관은 그분이 남겨준 DNA일까, 증조부의 것일까.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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