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로 시작해 사기죄로 끝난 재판…39년만에 재심 받는다

중앙일보

입력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로 무장군인들이 고려대 캠퍼스에 들어가 학생들을 연행해 가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로 무장군인들이 고려대 캠퍼스에 들어가 학생들을 연행해 가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긴급조치 9호로 영장 없이 체포된 뒤 다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더라도 이 또한 재심을 받아볼 만하다는 대법원 결정이 나왔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재심을 받아보겠다며 아들이 나선 지 5년 만이다.

이야기는 3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7월, 최모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영장 없이 체포돼 경찰서에 갇힌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수사 내용을 토대로 재판이 이어졌다. 그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됐다. 최씨는 긴급조치 9호에 대해서는 ‘면소(기소를 면함)’를 선고받았지만, 반공법위반‧사기‧업무상횡령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근거로 여러 개의 긴급조치를 발령했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에 발령한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행위’를 처벌해 사실상 정권을 비판하는 모든 표현을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영장 없이도 체포·구속·압수‧수색할 수 있도록 했다.

1979년 긴급조치가 해제된 후 석방자들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1979년 긴급조치가 해제된 후 석방자들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이후 대통령이 여덟 번 바뀌고 난 뒤인 2013년 3월, 헌법재판소는 이 긴급조치들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집권세력에 정치적 반대 의사 표시는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자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 "국가형벌권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며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침해했다”는 점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확인해 주었다.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전원일치 의견으로 모두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 뉴스1 ]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전원일치 의견으로 모두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 뉴스1 ]

이후 긴급조치로 처벌받았던 이들의 재심 청구가 줄을 이었고, 잘 몰라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검찰이 직접 나서 재심을 청구해주기도 했다. 무죄 선고는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졌다. 하지만 최씨는 긴급조치위반죄가 아닌 다른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억울함을 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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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최씨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재심을 받게 해달라’고 청구를 냈지만 ‘재심 사유가 안 된다’는 검찰에 부딪혔다. 검찰은 “경찰관들이 최씨를 영장 없이 체포·구금한 것은 당시 영장 없는 체포·구금을 허용하던 긴급조치 제9호에 따른 것이다”면서 “경찰관들은 단지 당시의 유효한 법령을 따랐을 뿐, 직권을 남용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결국 최씨 사건은 2015년 10월 대법원에 왔다. 대법원은 “(최씨의 경우는) 처벌 법규가 위헌인 경우가 아니라 절차상 하자가 있는 경우다. 이에 관한 학계 논의는 정리돼 있지 않고 검찰은 재심사유가 인정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대법원 2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2년 7개월 만의 심리 끝에 지난 2일 최씨의 재심을 허용하기로 했다.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내어 “재심제도의 이념‧목적, 헌법상 영장주의에 기초한 해석을 통해 새로운 법리를 선언함으로써 재심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비록 그것(최씨를 영장 없이 체포‧구금한 것)이 형식상 존재하는 당시의 법령에 따른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 법령 자체가 위헌이라면 결과적으로 그 수사를 기초로 열린 재판에서 확정된 유죄 판결에는 중대한 하자가 있다고 봐야 한다”면서 “만일 이런 경우를 재심사유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단지 위헌적인 법령이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하자를 바로잡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 부당하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따라서 경찰이 영장 없이 체포‧구금한 것은 불법체포‧감금의 직무범죄가 인정돼야 한다고 봤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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