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는 누구] "대중문화는 대중을 기만" 강한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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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6강의실. 철학강의를 하고 있는 노교수의 교단에 갑자기 가죽 코트를 걸친 젊은 여성 3명이 뛰어올랐다. 이들은 노 교수의 머리에 꽃가루를 뿌린 후 뺨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곤 토플리스 차림의 한 여성이 강의용 서류가방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교수를 밀어붙였다.

결국 교수는 땅바닥에 엎어졌다. 봉변을 당한 주인공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 철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였다. 그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던 팝뮤직.텔레비전.선정적인 광고 등 대중문화가 타락한 상업주의의 산물로서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며 강한 비판을 했다. 그가 젊은이들로부터 배척당한 것은 이 때문.

아도르노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이론가였다. 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발터 벤야민 등과 더불어 60년대말 서구 학생운동의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했던 프랑트푸르트 사회연구소에 참가해 비판이론을 20세기의 주요 사상으로 끌어올렸다.

유대인 포도주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랑크푸르트대를 졸업한 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음악평론을 썼다. 31년 모교에서 철학강의를 시작했으나 34년 나치정권에 의해 강단에서 쫓겨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로 귀국, 50년 모교에 철학교수로 부임해 마르쿠제와 하버마스 등의 후진을 지도했으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비판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학생운동이 폭력성을 띠는 것을 비판하면서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결국 아도르노는 학생들과의 격한 논쟁을 피해 휴가차 떠난 스위스에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철학.사회학.심리학뿐 아니라 음악.문학.미술 등 예술에 대한 식견도 전문가급이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음악이 처한 현 상황에 대해 아도르노보다 더 잘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 아도르노 연보

1903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

1921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음악학.심리학 전공

1925 오스트리아에서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 사사

1928 음악잡지 '여명(Anbruch)' 편집장

1931 키에르케고르의 미학 연구로 교수자격 청구논문

1938 나치를 피해 영국을 거쳐 뉴욕으로 이주. 사회연구소 연구원. 프린스턴대 라디오 조사 참가

1941 로스앤젤레스로 이주,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집필

1959 프랑크푸르트대 사회연구소장

1963 독일 사회학회 회장

1968 68운동 참가 학생들과 격렬한 논쟁

1969 사회연구소 점거한 학생들을 경찰 동원해 해산. 스위스에서 사망

주요 저서:'계몽의 변증법'(호르크하이머 공저)'부정의 변증법''불협화음:관리되는 사회의 음악''최소한의 도덕''신음악의 철학''미학이론''음악사회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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