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부른 「침묵의 팬터지」|「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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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수입외화의 범람속에서 유난히 가물었던 이 여름, 반가운 단비로 내린「찰리·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년)는 반세기를 뛰어넘은 오늘의 시점에서도 공명의 느낌표를 찍지 않을 수 없는 훌륭한 문화유산이었다.
그것은 결코 단발용 폭소극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침식된 인간에의 연민과 소외의 아픔을 인각시킨 신랄한 휴먼드라마다.
감독·주연뿐아니라 제작·각본·음악·안무등 1인6역을 맡아 왕성한 의욕을 과시한 「채플린」의 이 대표작은 화면 가득 넘치는 수많은 군중들의 절규보다도 강한 「침묵의 팬터지」로 보는 이들에게 호소해 온다.
거기에는 결코 익살로만 머무를수 없는 비애의 페이소스가 깔려 있다.
사람을 웃기면서 울리는 「채플린」의 「보는 언어」의 마력과「읽히는 연기」의 철학은 상대적으로 위압적인 인물을 빌어 스스로를 왜소화시키거나, 헐렁한 멜빵 바지, 몸에 꼭 끼이는 연미복의 저고리처럼 병약하고 엉뚱한 표현에서 비롯된다.
공장에서 일하는「찰리」에겐 세상의 모든것들이 나사못으로만 비친다. 그래서 심지어 여자의 옷에 달린 단추마저도 죄어놓고야 안심이 된다.
그의 이러한 강박관념은 결국 정신병자로 취급돼 격리되고, 퇴원한뒤에 노동쟁의의 선동자로 몰려 곤욕을 치른다.
그가 가난한 소녀「폴레트·고다르」와 알게 된것은 두번에 걸친 감옥샘활을 마치고 나왔을때 빵을 홈치던 그녀를 구해주면서다.
그들은 오두막 집에서나마「작은 행복」을 느끼지만‥.
「채플린」은 이영화에서 처음으로 발성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씻고 부분적으로 음향과 음악을 삽입하여 팬터마임의 극적효과를 높였다.
특히 한쌍의 방랑자가 밝아오는 여명의 지평선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역광의 라스트신은 뛰어난 영상감각을 보여준다. 김종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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