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28. 10월 유신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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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72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취임식을 하고 있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 정세의 급변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실정에 맞는 체제 개혁을 비상조치로 단행하게 되었다는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이 훗날 '10월 유신'이라고 정부.여당 측에서 부른 정치개혁 조치였다. 야당 측에서는 '궁중 쿠데타' 또는 '총통제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특별선언에서 밝혔듯이 남북대화의 적극적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비상조치였기 때문에 유신작업의 준비.기획.집행의 전 과정은 자연히 남북대화의 중추기구였던 남북조절위원회의 남측 위원장직에 있던 이후락 정보부장이 이끄는 정보기관이 주도했다.

추측컨대 준비작업은 은밀히, 그리고 치밀하게 상당 기간 진행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이후락 부장의 필체인 것으로 보이는 특별담화문 초안을 건네받은 것이 발표일보다 몇 개월 전인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문안은 초록색 필기구로 쓰여 있었다. 박 대통령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담화문 초안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갖고 가서 잘 읽어보시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두시오"라는 말만 남기었다.

앞서 71년 12월 비상사태 선언 때 자유와 민주주의가 그토록 소중하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기본권의 일부를 유보할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강한 '마취제'를 이미 맞았기 때문일까. 그 문안을 받아들고 돌아설 때만 해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문장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보니 국회 해산과 정당.정치활동의 중지 등 일부 헌법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 후 다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다는 내용 등이 눈에 들어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야당의 반응을 추측해 보았다. "민주주의 말살"이니 "영구집권기도"니 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가만있자, 이것이 정말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선 남쪽 땅으로 피란 내려왔단 말인가"하는 회의감에 빠져있는 내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헌법을 다시 만들자는 얘기 아닌가. 누가 없앤다고 하나.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려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좀 더 잘 지키기 위해 헌법을 고치고 정치개혁을 한다는데 민주주의 말살은 아니지 않은가.""자유고 민주주의고 먼저 나라가 있고 난 뒤의 일이다. 일제 치하 때 나라가 없는 우리 선인들이 겪었던 설움을 생각해 보라." 나는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유신은 분명히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물며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서랴.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유신은 우리나라의 특수성이 그 당시 우리에게 벌을 주느라고 퍼부어준 시련이었다고. 그래서 유신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역사적 평가는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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