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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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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30면

영화 '소공녀'

미국 작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1888년 발표한 『소공녀』는 세계명작동화 목록 중 하나다. 부자 아빠를 둔 소녀가 아빠를 잃고 하녀로 전락했다 다시 부유한 삶을 얻게 되는 이야기말이다. 소설의 제목을 차용한 영화는 부제처럼 영어 제목을 달고, 다름을 시사한다. ‘마이크로해비타트(microhabitat)’.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생물의 서식에 적합한 미소(微小)서식지를 뜻한다.

소설 『소공녀』는 소녀의 하녀 체험기다. 결국 왕자(부자)가 소녀를 구원한다. 하지만 한국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이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 도우미다. 그는 소위 ‘성장’하지 않는다. 취향도 확고하고 단단하다. 미생물이기는커녕 극중 어느 누구보다도 완전해 보인다. 미소는 무엇을 해야 스스로 행복한지 안다. 극본과 연출을 맡은 전고운 감독은 “집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버리며 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정반대의 인물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며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리는 캐릭터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작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렇다. 미소는 집을 버린다.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다. 미소는 행복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위스키 바에서 마시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이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물가는 계속 오른다. 가사 도우미로 버는 하루 일당은 4만 5000원인데 어느 날 담뱃값이 오르고, 위스키 한 잔의 값도 오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담배와 위스키를 끊겠지만, 미소는 월세방을 뺀다. 그리고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함께했던, 자유로웠던 청년기를 함께했던 멤버 넷을 찾아가 하룻밤을 청한다. 역발상적 결정이자, 비정상적 행동이다.

그런데 이 지점부터 도심 속 로드무비로 전환한 영화의 전개가 꽤 흥미롭다. 민폐 캐릭터가 될 뻔한 미소는 차분한 관찰자로 전환한다. 미소는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고,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는” 사람이다. 오히려 집이 있는 친구들의 삶이 괴이하고, 요란하게 펼쳐진다.

베이스를 맡았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며 더 큰 기업에 가기 위해 점심 시간에 회사 휴게실에서 스스로 링거를 놓는다. 보컬리스트였던 오빠는 부모 집에서 캥거루족으로 살고 있다. 부잣집으로 시집 간 기타리스트 언니는 과거를 숨기고,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며 산다. 드럼을 치던 동생은 결혼하고 아파트를 샀지만, 곧바로 이혼했다. 그는 밤이면 ‘히키코모리’처럼 작은 방에서 울며 술 마시고, 아침이면 멀쩡한 샐러리맨으로 출근한다. 그의 잊히지 않는 촌철살인 대사 중 하나. “월급이 190만 원인데 이자ㆍ원금으로 매달 100만 원씩 20년을 갚아야 해. 그런데 다 갚으면 새 아파트가 헌 아파트가 돼.”

미소의 ‘집 포기’라는 상황 설정 탓에 동화처럼 출발한 영화는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서서히 현실에 뿌리 내린다. 감독의 예리한 관찰력은 카메오로 등장하는 부동산 아줌마조차도 그냥 스쳐 보내지 않는다. 아줌마는 미소와 함께 서울에서 제일 집값 싼 동네, 곰팡이 가득한 방을 돌아보며 모든 악조건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다가 미소의 잔고를 파악하고는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미소는 취향을 지켜가며 자신의 작은 서식지를 만들려고 끝까지 분투한다. 돈만 없을 뿐, 무엇을 위해 사는지 분명한 미소를 향해 스크린 밖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사 측은 “비싼 집값 때문에 결혼과 출산도 포기하는 N포 세대의 N차 관람이 줄 잇고 있다”고 전한다. 총 제작비로 3억5000만원을 들였는데 박스 오피스 10위권 안을 꾸준히 지키더니, 누적 관객 수가 4만 3000명을 훌쩍 넘어섰다. ●

감독: 전고운
주연: 이솜 안재홍
등급: 15세 관람가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광화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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