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미중 4자회담, YS 제안으로 한때 성사...실패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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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3일 “남·북·미 정상회담과 남·북·미·중 정상회담은 선순위와 후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미·중 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날 청와대가 “남·북·미·중 4자 회담보다 남·북·미 3자 회담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한 부연 설명이었다.

4자회담 문제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지난달 9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남북과 미·중이 참여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해 ‘새로운 (한반도)안전보장의 틀’을 제안했다는 언론 보도(1일 일본 교도통신)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미·중은 한 번도 공식적인 논의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았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시 주석의 의지는 매우 강하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4자회담이라는 아이디어가 처음 공개적으로 제안된 것은 1975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이 유엔 총회에서 한국의 휴전협정을 새로운 체제로 대체하기 위해 남북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 때는 북한이 “영구 분단을 꾀하자는 것”이라고 반발해 동력을 얻지 못했다.

그 뒤 4자회담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북·미 간 제네바 합의(1994년) 이후였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 간 관계 개선 문제를 다뤘는데, 정작 한국은 합의 당사자에서 빠져 있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 한국은 한발 물러선 채 경제적 지원 의무만 이행하는 구도가 형성되자 김영삼 대통령(YS)이 개입의 계기를 마련했다. 96년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 증진을 위한 4자회담을 공식 제의한 것이다. YS는 당시 제안에서 “새로운 항구적 평화체제 추구는 남북한이 주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평화체제, 긴장 완화, 신뢰 구축 등 포괄적 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유보적 태도로 좀처럼 동력을 얻지 못하던 4자회담은 97년 12월에야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열렸다. 4개국이 의장국을 번갈아 맡으며 3~4개월 간격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회담을 거듭해도 “주한미군 철수부터 논의하자”는 북한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고, 4자회담은 99년 8월 6차 회담을 끝으로 종료됐다. 북한의 입장 변화 없이는 어떤 형태의 다자 논의 틀도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 입증된 셈이었다.

이는 현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한국의 특사단을 만났을 때 비핵화의 조건으로 내건 ‘위협 해소’를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등 한·미 동맹과 연결시킨다면 역시 논의의 진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현재 중국이 제안하는 4자회담은 그간 주장해온 쌍궤병행(비핵화 논의와 평화체제 논의의 병행)과 같은 맥락이다.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중국은 지금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중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도권을 쥘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는 중국이 2차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10·4 선언에 예민하게 반응해 온 것과도 연관이 있다. 10·4 선언 4조항은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3자는 남·북·미로 인식되기 때문에 중국으로선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가 동시에 진행될 경우 평화체제 논의만 앞서가가고 정작 비핵화 논의는 진전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가 그간 중국의 쌍궤병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온 이유도 여기 있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는 “현구도에서 중국이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게 된다면 3자든 4자든 이후의 진전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정부도 중국이 원하는 4자회담에 대해 정교한 전략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하게 되더라도 기간을 특정하고 조건을 단순화해 지지부진한 논의만 하다 결론을 보지 못하는 과거와 같은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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