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외압에 대항한 「71년 파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우리 형사지법 법관들은 검찰이 현직법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처사가 사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사법권에 대한 침해행위로서 이러한 여건아래서는 더이상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 사표를 제출키로 했다.
71년7월28일 오후5시쯤 서울형사지법 소속법관 37명이 무더기로 사표를 제출, 법조계 안팎이 발칵 뒤집혔다.
이른바 71년의 사법파동. 「6·15법관서명」이 사법권 독립을 위한 사법부내의정품운동이라면 71년의 사법파동은 외세에 대항한 사법부의 자구책이었다.
71년의 사법파동은 시국사건에 대한 잇단 무죄선고·영장기각 등으로 누적된 검찰의 법원에 대한 불만이 엉뚱하게 폭발된게 불씨였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7월28일 0시40분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배석인 최공웅 판사 등 법관2명과 재판부서기 이남영씨 등 3명에 대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들은 조총련계 재일동포로부터 학교운영지원금을 받아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방택 피고인의 재판부. 증인신문을 위해 제주도출장중 동행했던 변호사가 제공한 10만원 상당의 저녁대접 향응과 항공여비를 대접받았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당직이던 손진곤 판사(현 서울형사지법수석부장)는 『선배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후배가 심리할 수 없다』고 버텨 유태흥 수석부장(전대법원장)이 맡아 심리한뒤 기각해 버렸다.
현직 법관에 대한 독직혐의 영장은 처음있는 일이었고 더구나 당시로서는 관행이던 정도를 갖고 검찰이 너무 심하다고 발끈하고 나선 것.
판사들의 집단사표에도 아랑곳없이 검찰은 하루뒤인 29일 영장 재청구로 맞섰고 서울형사지법 백종무 부장판사는 다시 기각해 정치문제로 비화됐다.
검찰이 너무 심하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30일에는 서울민사지법을 비롯, 부산·대구 등의 지방법관들도 일괄사표를 제출해 사법부가완전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사법파동의 도화선은 법원이 신민당사 점거농성사건관련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일이었습니다.
검찰은 당시 분위기로 보아 자칫 무죄선고 가능성이 많자 7월1일의 박대통령 취임식을 목전에 두고 있으므로 취임식후로 선고연기를 요청했으나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6월29일 무죄선고를 강행했던 것.
박대통령은 크게 노해 청와대에 보고차 들른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결재판을 집어던지며 몹시 화를 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된 『다리』지사건의 임중빈 피고인등 3명에게 무죄가 선고된데다 공안사건에 대한 잇단 무죄·영장기각으로 골치를 앓던 검찰이 「죽을 꾀」를 낸 것이었다. 법관사표사태가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5일만인 8월1일 신 법무장관은 민복기 대법원장을 찾아가 『박대통령의 지시로 검찰은 이 사건을 백지화시키로 했다』고 밝혀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기세가 오른 법관들은 8월9일 검찰관계자의 문책을 요구하고 나섰고 서울지검 검사들은 전체검사회의를 옅어 법관들의 요구가 검찰권침해라고 맞서 판사·검사들의 자존심싸움으로 악화됐다.
검찰의 반격을 받은 법관들은 민 대법원장을 찾아가 박대통령으로부터 사법권독립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아오도록 요구하며 사표철회를 거부했다.
결국 법무부는 8월24일 검사들의 대폭인사를 통해 김용제 서울검사장이 대검검사로, 최대현 서울지검공안부장이 서울고검검사로 물러앉았다. 공안부의 김종건 검사는 전주지검, 이규명 검사는 천안지청으로 각각 좌천됐다.
대법원판사들은 이와함께 『앞으로는 사법권을 침해하는 행동이 없을 것』이란 신 법무장관의 육성을 녹음테이프에 담아 전국법원을 돌며 법관들을 설득, 발생 한달만인 8월28일 법관들이 사표를 철회하면서 사법파동은 마무리됐던 것.
구속영장이 청구됐던 재판장 이범렬 부장판사는 이때 모든 책임을 지고 법복을 벗었으나 동료법관들의 열화같은 지원에 힘입어 변호사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배석이던 최공웅 판사는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 현재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으며 뛰어난 능력으로 사법부내의 신망이 두텁다.
당시 검찰의 주역들은 모두 검찰을 떠나 대부분 변호사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사법파동의 주동자와 강경파 법관들은 72년 10월 유신이후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명 과정에서 대거 탈락됐다. 보복인사의 냄새가 짙었지만 법관들은 유신의 기세에 늘린 탓인지 더이상 표면적인 저항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후 사법부는 완전히 권력의 장악하에 놓이게 된 것.
한 원로법조인은 유신의 보복인사만 없었더라도 사법파동이 사법권독립의 전기가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6·15법관성명」도 후유증없이 잘 마무리되어야 사법부를 위해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신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