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형량 주어진 시국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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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의로운 판사는 구색 맞추기용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판사는 잘풀린다.』
80년대 중반 5공화국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재경법관들사이에 나돌았던 자조적인 유행어다.
『80년 이후 시국사건의 「양형 동일화」현상은 유신때부터 지켜지던 악습으로 청와대의 여형을 절대로 지키는 것이 불문율이었지요. 특히 주요 시국사건은 기관의 조정관이 검사장에게 선고량을 전달하면 검사장이 형사법원장 또는 수석부장에게 전했어요. 전달내용도 거의 변경된 적이 없었고 어떤 부장판사는 오히려 한술 더 뜨는 실정이었습니다.』
현직의 한 법관은 악몽같은 얘기라며 씁쓸해했다. 그는 이때문에 형사법원의 요직은 「시국관이 뚜렷한」해바라기 법관들이 독차지했다고 덧붙였다.
양심에 따른 판결은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였고 사표조차 내기 힘들어 어느 법관은 사표를 냈다가 『너만 살려고 그러느냐』는 집단비난과 함께 되돌려 받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80년대 이전까지 법관들의 꿈은 「서울민사지법부장」이였지만 사법부의 시류 영합현상이 두드러지고 시국사건이 많아지면서 「형사부장」이 각광받는 자리로 부상했다.
이때부터 형사부장은 승진이 보장되기 시작했고 특정지역·특정고교 출신들이 대거 차지하는게 관례가 됐다.
사법부의 정치권력 유착은 특히 5공화국이후 심화된게 특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청와대·정화위 등 권력기관에 법관들을 파견시킨 일이었다.
이곳에 파견된 중견 법관들의 임무는 그 기관의 법률자문과 사법부의 창구 역할이었지만 내면적으론 법원 고위간부와 권력 핵심층의 연결고리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주도세력들의 심중이나 동향을 살필 길이 없었던 법원간부들로서는 정보원을 둔 셈이었다. 이들중 일부는 행정부와 사법부 고위층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결국 법원행정 전반과 특히 법관인사 등에까지 입김을 작용하는 실력자로 통할 정도였다.
이때문에 파견생활을 끝내고 법원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중 몇몇은 바로 개선장군이었고 심한 경우 30∼50명의 선배법관을 앞질러 발탁, 승진되기 일쑤였다.
지난해 여름 괴문서사건에 거론된 S부장판사도 청와대에 파견됐던 법관. 그는 서울고법판사로 있던 80년 대통령 민정비서관으로 파견된 후 그곳에서 서울민사부장·광주고등부장으로 승진하는 보직관리를 하고 바로 노른자위인 서울고법 부장판사겸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6·29선언후인 지난해8월 정기인사에서 청와대에 2명의 법관을 파견 발령한 대법원은 이들의 발령사실만은 보도하지 말도록 언론기관에 부탁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본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세월이 바뀌어 법관의 권력기관 파견이 떳떳치 않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법관인사의 난맥상은 제5공화국 사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82년 부산지법의 서석구 판사는 부산대 학원사태 주동자인 이호철 피고인의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에 무죄를 선고했다가 곧바로 진주지원으로 좌천됐다.
당시 유태흥 대법원장이 부산지법원장을 불러 『아직도 그런 판사가 있느냐』고 역정을 낸 일은 유명하다.
법관의 신분보장이 사법권 독립의 요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는 법원간부들이었지만 그것은 구호일 뿐이었다.
85년 9월 법관인사를 비판하는 글을 법률신문에 기고한 서울민사지법 서태영 판사는 부임 하루만에 울산지원으로 전보 발령됐다. 또 같은해 가두시위 대학생1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인천지법 박시환 판사가 발령 6개월만에 영월지원으로, 즉심에서 재야단체 간부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서울형사지법 조수현판사가 강경 지원으로, 영장기각률이 높았던 같은 법원의 윤재식 판사가 원주지원으로 각각 좌천 발령된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같은 인사로 결국 유대법원장은 사법사상 처음으로 야당에 의해 탄핵발의되는 수모를 겪게되었고 소장법관들은 이때도 소리없는 아우성들이었지만 이번처럼 행동표시는 없었다.
「6·15법관성명」의 참가자는 거의 80년 이후 임관된 법관들.
이들은 법관 초창기인 80년 김재규 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판사 1명이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뒤 6명 모두 법복을 벗는 사법부의 수난을 지켜봤고, 81년 초에는 김대중사건의 확정판결이 대법원에서 채 선고되기도 전에 정부가 김 피고인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한다고 발표하는 난센스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물어야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그렇기때문에 법조계 원로들 중에는 이번 서명사태를 『가장 비극적인 시기에 법관 초창기를 지낸 미래 사법부의 주역들이 민주화 열기 속에서 탈바꿈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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