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감염땐 떼죽음…유럽 '멧돼지 장벽' 1200㎞ 세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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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리투아니아는 벨라루스와 국경 장벽을 강화하는 작업에 나섰다. 군인이나 탱크 같은 무기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멧돼지 때문이었다. 감염되면 사실상 100% 죽는 바이러스성 돼지 전염병인 '아프리카 돼지 출혈열(ASF)'이 멧돼지를 매개로 집에서 기르는 돼지 등으로 번지면서 유럽에 비상이 걸렸다.

감염시 돼지 떼죽음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 유행 #사람에겐 무해하지만 발병시 돼지 관련 수출길 막혀 #폴란드·덴마크 장벽 세우고 독일 멧돼지 사냥 허용 #국내서도 "선박 음식물쓰레기 점검" 감염 우려 논의 #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 바이러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야상 멧돼지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체코수의학처]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 바이러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야상 멧돼지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체코수의학처]

 리투아니아 국경 수비대는 당시 국경을 오가는 트럭에 살균제를 뿌렸고, 당국은 20㎞ 감시구역을 정해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2014년 1월 리투아니아 국경에서 발견된 죽은 멧돼지 두 마리에서 ASF 양성 반응이 나타났다. 이후 이 전염병은 유럽연합(EU) 서쪽 지역으로 퍼져나가 발트해 연안 3개국과 폴란드 등에 나타나더니 지난해 11월에는 독일·덴마크와 가까운 폴란드에서도 발견됐다. 이에 따라 돼지고기 수출이 농축산물 수출의 19%를 차지하는 덴마크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사이언스 저널이 보도했다.

 ASF는 1921년 동아프리카에서 처음 보고됐다. 인간에게는 해롭지 않지만 돼지가 감염되면 고열과 내부 출혈 등으로 1~2주 안에 90% 이상이 죽는다. 돼지의 경우 예방 백신이 없고 급성일 경우 치료제도 소용 없어 병이 확산하면 해당 국가의 양돈산업을 뒤흔든다.

 ASF는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흔해지다 1957년 포르투갈에 처음 상륙해 유럽을 강타했다. 이후 스페인에서도 발병했고, 아프리카를 거쳐온 선박 등에서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통해 조지아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틱해 연안 국가와 폴란드에서 발병했던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이 지난해 체코와 바르샤바 근처에서도 발병했다. [자료:사이언스저널, 세계동물건강기구]

발틱해 연안 국가와 폴란드에서 발병했던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이 지난해 체코와 바르샤바 근처에서도 발병했다. [자료:사이언스저널, 세계동물건강기구]

 유럽전문매체 유랙티브와 독일 도이체벨레 등에 따르면 폴란드 정부는 ASF 유입을 막기 위해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 1200㎞의 장벽을 세우기로 했다. 지상 2m 높이로 건설될 철제 장벽은 멧돼지의 월경을 막기 위한 것인데, 2020년 완공 예정이다. 멧돼지가 땅을 팔 수 있어서 지하 깊숙이까지 매립된다. 덴마크도 독일과 접경한 남부 국경을 따라 70㎞ 길이의 철제 울타리를 설치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등 멧돼지 장벽 설치 국가가 증가하고 있다.

 독일은 지난달 멧돼지 수렵 기간을 풀어 연중무휴 사냥을 허용했다.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에서도 축산 농민들이 멧돼지 수렵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구 중이다.

 유럽 국가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ASF가 발병하면 돼지고기 수출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2014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 발생하자 러시아가 유럽 전역의 돼지고기와 돈육가공품의 수입을 중단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멧돼지가 힘이 세고 영리해서 장애물을 돌파하는 능력이 뛰어나 국경 장벽이 효과를 발휘할지에 회의적이다. 이미 벨라루스 등이 유사한 대책을 시행해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제동물질병사무국(OIE)은 ASF 감염이 보고되지 않은 나라의 경우 돼지나 돈육가공품 수입 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감염국에서 오는 항공기나 선박의 음식쓰레기 처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했다.

독일 방역 요원들이 2015년 9월 2일 치명적 돼지 전염병인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이 발생한 드레스덴의 한 농가에서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독일 방역 요원들이 2015년 9월 2일 치명적 돼지 전염병인 아프리카돼지출혈열(ASF)이 발생한 드레스덴의 한 농가에서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한국양돈수의사회도 지난 22일 대전에서 포럼을 열고 돼지에서 나오는 축산물이 항공이나 항만, 국제택배를 통해 국내로 불법 반입되거나 야생 멧돼지를 통해 ASF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아직 국내 발병 사례는 없지만 러시아와 몽골 국경 지역까지 동진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사례 연구에서는 ASF 바이러스에 오염된 돼지 축산물이 잔반 형태로 사육 돼지에게 먹이로 주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내 농가에 대해서도 실태조사와 함께 발생 시 조기 대응기반을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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