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이제「생의 끝」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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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련의 대한국시각이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다. 소련공산당에서 프라우다에 버금가는 권위지인 공산청년동맹기관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 (발행부수 1천7백만부)는 지난5월22일 「38선 이남」이란 기사에서 한국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하고 정치·사회분야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이 신문이 게재한 소련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선임연구원「쉬파예프」씨의 전문(2백자원고지30장분량)을 발췌, 소개한다.
지리교과서를 통해보는 이 나라(한국)는 고풍스런 그림같은 나라다. 80년대초 경제지수상으로 이 나라는 세계 20대공업국이 됐다.
철강생산에서 14위, 전력생산10의, TV생산 4위, 조선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련)의 수백만 학생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이나라는 「생의 끄트머리」라고만 가르쳐지고 있다.
우리나라 교과서는 이 나라를 50년대 상황에나 걸맞은 정도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는 당시 실제로 후진농업국으로서 경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무상원조와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집권한 박정희대통령은 선진공업국으로의 전환을 위해 20개년산업화계획을 마련했었다.
중화학공업·전자·자동차·조선등 최신공업이 부존자원이 없고 인구가 과다하며 식료품이 부족한 이 황량한 땅에서 시작되었다. 유일한 자원은 풍부한 노동력뿐이었다.
초등의무교육의 실시와 직업기술학교의 설립등에따라 엄청난 숙련노동력이 양성됐다.
이 나라는 현재 인구 4천만명에 70개이상의 4년제대학이 있다.
한국의 이같은 성과의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수출주도형 발전모델 채택이다. 한국의 1962년도 수출액은 5천7백만달러를 넘지못했으나 1986년에는 3백40억달러에 달했으며 2000년까지는 1천2백50억달러에 이를 것이다.
둘째는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재정적·기술적 원조를 받아온것이다. 세째는 1965년의 대일본 관계개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경제의 부정적 요소는 세계시장의 메커니즘에 철저히 예속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석유가 전혀 없으므로·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1973년과 1979년의 석유위기는 한국경제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같은 침체에서 재빨리 일어섰다.
한국은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연평균 GNP (국민총생산) 증가율이 거의 10%에 달했으며 특히 공업부문에서는 35%에 달했다. 이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산업화과정에서 고등교육기관의 인문·기술 구조가 변화했다. 과거에는 인문분야가 주류였다면 이제는 경영학을 비롯, 기술분야가 우위에 있다.
1960년까지는 중등교육을 받은 정도의 사람이 회사를 경영할수 있었다면 지금은 사장등 경영진은 거의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경영분야는 「무능함」이 배제돼 있다.
또 한국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생산이 이따금 계획목표에 미달, 또는 초과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은 미리 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한국의 공업발전의 성공요소는 또 고숙련 노동력과 낮은 인건비다. 인건비는 미국노동자의 5분의1, 일본노동자의 3분의1에도 못미친다. 또 한국에는 최저임금이라는 것이 없다. 한국의 주당 노동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긴 평균 54시간이다.
이같은 질이 높고 값싼 노동력 덕분에 한국상품은 국제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내소요와 함께 정치의 활성화가 뒤따랐다. 우리나라 (소련) 각 신문에서 「곳곳에서 화산터져」라는 등의 신문제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우리나라 언론인들은 지난해12월 한국대통령 선거결과를 평가하면서 경제적 요인은 맨뒤로 제쳐놓기가 일쑤였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민생활수준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향상되고 있으며 실업문제가 있긴 하지만 다른나라에서처럼 그토록 심각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은 한국의 현 여당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요인이 됐다.
한국의 민주화 수준은 「마르코스」집권때의 필리핀이나 파키스탄 보다는 높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는 매우 계산적 성격을 갖고 있다. 공산당 창설은 상상도 할 수없다. 반공이 국시로 되어 있는것이다.
한국정치의 특징은 여러 그룹의 집권경쟁이다. 1987년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한국에서 여당은 거의 항상 일사불란한 통일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나 야당은 지도자의 야심이나 이기적인 욕심에 의한 무원칙한 의견차이·편향·이합집산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야간에는 대미·대소·대중공관계와 같은 중요 국제문제나 경제발전노선등에서는 서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한국정치는 1972년 여당의 대통령간접선거제 도입후 끊임없이 야당의 직선제 요구로 투쟁이 계속됐다.
투쟁의 파고는 1986, 87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노태우 당시여당 대표위원이 야당의 수많은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나섰다. 이에따라 야당은 또한번 패배를 맛보아야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대학생들의 소요에 대해 많은 기사를 써왔다. 한국에는 분명히 소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너무 단편적으로만 보고 있다. 때로는 잘못 본 것도 사실이다.「진보세력 출현」식으로 말이다.
한국학생운동의 약점은 그 사회의 다양성·광범위한 정치관, 그러면서도 이 정치관이 명확하게 설정돼있지 않다는 점이다.
반체제학생들이 특히 정치부문에서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 때가 가끔 있다.
예컨대 「과격파」로 불리는 학생들 가운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편협한 일파도 있다.
한국학생들은 부르좌 민주주의를 주창한다. 그리고 이들은 반공성향이 매우 강하다.
한국의 반미성향은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카터」미국대통령은 인권문제를 들고 나왔었다. 그러나 「카터」는 한국학생들에 아무런 것도 약속해주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반미성향의 뿌리가 있다.
한국에는 핵무기를 갖춘 미군이 4만명 가량 주둔하고 있다. 우리는 오는 9월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모습을 TV로 보기를 기대한다. 한국을 객관적으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번역=김석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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