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대문호 - 한국 작가 나일강변에서 손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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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소설가 한수산 교수(오른쪽)가 28일 카이로에서 이집트의 대문호 나깁 마흐푸즈와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류문명의 젖줄인 이집트의 나일강은 수도 카이로에 이르면 서울의 한강처럼 넓고 완만해진다. 그 강변 선상카페는 노을이 질 무렵부터 붐비기 시작하는 도시의 명소다. 28일 선상카페 '파라흐(기쁨)'에 95세의 노인이 나타났다. 아랍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집트의 대문호 나깁 마흐푸즈. 1988년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는 소설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94년 세속적인 작품활동을 비난하는 이슬람 과격 테러리스트의 칼에 찔린 이후 외부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그가 한국에서 온 소설가 한수산(세종대 교수)씨를 만나기 위해 강변으로 나왔다.

한 교수가 나타나자 마흐푸즈는 빙긋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대문호는 느리게 손을 내밀었다. 한 교수는 손을 잡고 한동안 말을 잊었다. 아랍 최고 문호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만남은 이날 오전 전격적으로 결정됐다. 한 교수는 한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아랍어로 번역되는 자신의 작품 '부초'의 출판기념 행사 참석차 이집트를 찾았다. 혹시나 하고 마흐푸즈에게 연락을 했다. 마흐푸즈는 한국 소설이 아랍어로 처음 번역된다는 소식에 면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 교수가 갓 나온 자신의 책을 전달했다. 마흐푸즈는 "응, 읽어달라고 해야겠네"라며 밝게 웃었다. 그는 노안이 심해 책을 읽지 못한다.

한 교수가 "아랍어로 된 한국어 소설을 본 적이 없으시죠"라고 물었다. 마흐푸즈는 "이런 시도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잘된 일이다. 앞으로 계속되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한 교수가 최근 이집트에서 불고 있는 한류와 관련, "6개월 전 한국어과를 만든 아인 샴스대학을 가보니 학생들이 말을 잘하더라"고 하자 마흐푸즈는 "이집트인들은 늘 마음을 열어두고 살지요"라고 강조했다.

마흐푸즈는 아랍문명권과 서구사회 간의 갈등에 대해 "서로 다른 문명 간의 문화교류가 보다 활성화돼야 해요. 알아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충돌을 막을 수 있지"라고 역설했다. 최근 서구 신문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린 만화를 게재해 무슬림들의 반발을 불러온 사건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의 성스러운 상징은 누구든 존중해줘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간결하지만 본질을 포착하는 혜안이 느껴졌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대문호의 외출소식을 들은 이집트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한 교수와 소설을 아랍어로 번역한 외국어대 이영태 교수 등 일행은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일어나려하자 마흐푸즈가 다시 천천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한번 축하해요. 한국 작품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을 계속 해주세요."

이번에 아랍어로 번역된 한국소설은 모두 3편이다. 한 교수의 '부초'외에 김주영의 '천둥소리'와 염상섭의 '삼대'다. 한국문학번역원 후원으로 추진된 한국소설 아랍어 번역 1차 사업의 결과다. 한국중동협회(회장 한덕규 교수) 소속 아랍어문학자들이 번역을 맡았다. 소설은 카이로대학에서 출판된다.

글.사진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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