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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노 딜, 나쁜 딜, 좋은 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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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994년 제네바 협상의 주역이었던 갈루치 미국 대표와 강석주 북한 대표의 대화.

김정은·트럼프·문재인 서로 다른 절박함 #‘노 딜’ 피하려다 ‘나쁜 딜’ 되지 않기를

“부상!(강석주는 당시 외무성 부상) IAEA 특별사찰을 어떻게 할 것이오?”(갈루치)

“그런 불공정 횡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소. 말도 꺼내지 마시오.”(강석주)

“여긴 우리 둘밖에 없소. 이렇게 합시다. ‘IAEA가 사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행한다.’ 어떻소?”(갈루치)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요?”(강석주)

“특별사찰이오.”(갈루치)

핵심 현안이던 IAEA(국제원자력기구) 특별사찰은 이렇게 타협됐다. IAEA가 요구하면 반드시 사찰토록 해야 하는 ‘특별사찰’이란 표현은 합의문에서 사라졌다. 대신 “IAEA와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한다”는 선에서 조율됐다. 갈루치는 “북한이 특별사찰을 (사실상) 수락한 것”이라 했다. 강석주는 “특별사찰은 언급도 안 했다”고 잡아뗐다. 갈루치는 이를 “창의적 타협”이라 표현한다. 물론 “엉터리 속임수였다”고 혹평하는 이도 많다. 어찌 됐건 이 타협을 이루는 데만 1년 넘게 걸렸다.

협상 기간 중 강석주는 갈루치가 좋아하는 인삼차를 선물했다. 갈루치는 강석주의 식성을 간파하곤 타바스코(핫 소스) 큰 병 하나를 선물했다. 또 강석주가 인용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원작 소설책을 구해 줬다. 나름의 신뢰가 쌓이기까지는 이런저런 절차가 필요했다.

갈루치가 “미·북 정상회담에서 ‘일괄타결’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자신하는 이유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1주일 이상 방에 처박혀 담판을 짓고, 동시에 바로 옆방에서 양측 베테랑 실무진이 세부사항을 조율해야 겨우 ‘기본 합의’ 정도 나올 수 있을까 말까란 주장이다. 하루 이틀 반짝 회담 갖곤 어림없다는 것이다. 사실 5분이 넘어가면 대화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트럼프 스타일상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다.

물론 정반대 견해도 있다. 로이 스테이플턴 전 주중 미국대사는 “70년대 미국이 중국과의 수교라는 ‘빅 딜’을 한 건 키신저 국무장관도 아니고, 포드 부통령도 아니고, 바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외교는 결국 정상의 결단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은 기존에 갖고 있는 옵션을 주고받기 하는 타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회담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둠 속 기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곧 길을 만든다”는 중국 혁명가 루쉰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적은 기적같이 오지 않는다. 절박함이 기적을 만든다. 이란 핵 협상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물가가 50% 이상 치솟아 파탄 직전에 간 이란의 절박함과 8년 임기 동안 제대로 된 외교 실적 하나 없었던 오바마의 절박함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미·중 수교도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 미국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는 닉슨 대통령의 절박함에서 비롯됐다. 그들에게 ‘노 딜(No deal)’이란 없었다. ‘나쁜 딜(Bad deal)’이라 해도 해야만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앞길이 구만리인 30대 중반 김정은의 미래에 대한 절박함, 특검수사와 탄핵 위기가 코앞에 닥친 트럼프의 현재에 대한 절박함, 그 둘 사이를 제대로 중매하지 않으면 한반도 위기를 초래하고 말 것이란 문재인의 시대적 절박함이 뒤엉켜 있다. 이들 또한 ‘노 딜’이란 없다. 그저 절박함이 ‘어둠 속 기적’을 만들어내길 바랄 뿐이다. 반드시 ‘좋은 딜(Good deal)’로 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