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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물려주고픈 ‘추억의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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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28면

▶철길떡볶이
주소: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5-6(충정로3가 143-2)
전화: 02-364-3440
매일 오전 11시~오후 8시(토요일·공휴일 휴무)

강혜란의 그 동네 이 맛집 <18·끝> #충정로 ‘철길떡볶이’

“예전이랑 떡볶이 색깔이랑 모양·맛이 똑같아요. 그땐 가게가 요만~했는데…. 태어나서 처음 먹은 떡볶이라 이 맛이 저한텐 ‘오리지널’이예요.”

서울 충정로 경의선 선로 인근, 창밖으로 덜컹덜컹 기차소리가 울리는 가게 안에서 손님 황정욱(35)씨가 말했다. 인근 경기초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떡볶이집은 친구들과 하교 길에 오락실 다음으로 들르는 코스였다. 진학·이사를 거치며 잊어버린 그 집이 자리를 옮겨 영업 중이란 걸 최근 동창회에서 알게 됐다. 압구정동에서 자가용을 몰고 온 황씨는 “결혼해서 따로 사는 형도 ‘수십년 만에 맛보고 싶다’ 해서 들렀다”면서 떡볶이와 김말이 튀김을 포장해 갔다.

지금은 ‘철길떡볶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당시엔 이름 없는 포장마차였다고 사장 박미희(57)씨가 말했다. 작고한 시어머니 설복자씨가 1980년대 초 남편이 해외 건설 나간 동안 세 자녀를 건사하려 차렸다. “그땐 철길 건너편 연세학원 근처에 있었죠. 인근 경기초·미동초·인창고 뿐 아니라 멀리 이화여고 학생들도 와서 먹었어요. 어머님이 전라도 정읍 출신인데 손맛이 워낙 좋으셨거든요.”

현재 가게 자리엔 원래 모래·시멘트 등을 취급하는 건재상이 있었다. 지금처럼 비늘판벽 목재마감을 한 단층 건물이었다. 시아버지 귀국에 맞춰 건물을 인수한 게 90년대 말. 건축 사무소 한쪽 벽을 갈라 귀퉁이에서 장사를 하다가 2005년쯤 건축 일을 접으면서 전체로 확장했다. 그래봤자 테이블 서너 개 놓인 실내 포장마차다. 철길떡볶이라는 이름은 손님이 지어줬다고 한다.

입구에 놓인 종이에 주문 메뉴를 쓰고 자리를 잡았다. 물이건 어묵 국물이건 직접 떠와야 하고 계산도 현금만 가능하다. 동그란 똑딱이 스위치로 작동되는 형광등이 대낮에도 실내를 밝혔다. 연통 난로, 다이얼식 TV 모두 ‘빈티지’란 말조차 무색하게끔 세월의 더께가 앉았다.

“떡볶이 나왔어요~.” 부름에 후다닥 달려가 접시를 받아왔다. 손가락 크기만한 밀떡들이 단풍같은 고추장 소스를 자작하게 둘렀다. 따끔·화끈한 매운 맛이 아니라 단맛 사이사이 강약을 넣어주는 칼칼한 ‘어린이용’ 매운 맛이다. 속이 빈약하다 싶은 김밥도 어린 시절 그때처럼 떡볶이 국물에 묻혀 먹으니 제맛이다. 순대·어묵·김말이튀김까지 둘이서 실컷 먹었지만 1만원이 채 안 나왔다.

가게 문은 오전 11시에 열어도 황씨의 하루는 오전 7시부터 시작된다. 무르지 않고 쫀득한 식감을 낼 수 있게 그날그날 배달 오는 떡을 받기 위해서다. 4㎏가량 되는 밀떡 봉지 9개를 다 팔면 그날 장사는 끝이다. 나머지 분식 재료는 시장에서 반제품으로 떼와서 가게에선 데우거나 튀겨 팔기만 한다.

떡을 비롯한 재료를 어디서 주문하느냐 물으니 “시어머니 때부터 거래하던 곳”이라는 말 뿐이다. 혀에 찰싹 감기는 고추장 소스 역시 “일주일 쓸 분량을 매주 담그는 게 일”이라고만 했다. 남편 허덕회씨는 “어머니 때부터 ‘지점 내자’는 요청이 많았지만 우리만의 비결로 이어갈 것”이라며 “아들 대에 가면 3대가 내리하는 떡볶이집이 될 것”이라고 자긍심을 보였다.

정우성이 주연한 영화 ‘신의 한수’(2014) 촬영지로 쓰이는 등 숱한 유명인사들이 들렀다지만 가게 안엔 사진 한 장, 사인 한 장 없다. 허씨는 “여긴 입소문으로 장사하는 곳이다. 누가 와도 편하게 드시도록, 유명인이 와도 아는 체 안하고 사인 달라 소리도 안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인스타그램 등 젊은 층의 ‘인증샷’ 덕에 새로운 손님들도 많이 찾는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어렸을 때 먹던 옛날 떡볶이 맛”이란다.

실은 회사에서 도보 10여분 거리인데도 최근에야 알았다. 처음 갔을 땐 철길 옆에 위태롭게 자리한 모습이 장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여름에는 옥상에서 내려오는 담쟁이 넝쿨이 가게 전체를 삼킬 듯 너울댄다. 허름한 풍경에서 낭만과 운치를 느끼는 건, 몸은 자랐어도 혀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의 여유’일지 모른다.

언젠가 이곳이 자리를 옮겨 콘크리트 건물에 깔끔 화사하게 입주한다면 그때도 이 맛 그대로일까. 이 맛이 세계인의 취향에도 맞을지, 어쩌다 ‘세뇌된 미각’의 작용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온 세계 최고 요리사도 말했다. “식당을 떠날 때 손님에게 남는 건 오직 기억(memories)이다. 시간을 멈춘 채 가족이나 파트너와 친밀감을 느끼는 것. 음식은 그 경험에 기여하는 것이다.”(피에르 가니에르, 2016년 9월23일자 중앙일보 인터뷰)

가게를 나서는데 30대 부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들어와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았다.

글·사진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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