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박종규 연행되기 직전 전장군에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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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정풍파의원들의 공격에 대해 『당국에서 조사해보면 알것』이라고 호언했던 이후낙씨는 그의 말대로 당국의 조사를 받게됐다. 물론 그가 희망한 방식은 아니었다.
「소문난 잔치」운운하며 『별로 가진게 없다』고 했으나 계엄사는 그가 1백94억여원을 축재했다고 발표했다.
계엄사가 밝힌 이 액수에는 이씨가 육영사업이라고 주장하는 울산육영재단·우석장학회의 1백33억4천여만원이 포함됐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60억여원이나 됐다.
그 내용은△가옥 6채 (10억3천1백93만원) △토지 1백17만8천9백77평 (29억8천7백52만원) △현금·주식·귀금속 (20억6천6백88만원)등이었고 계엄사는 그가 고위관직을 이용, 「적극적인」인 이권개입으로 수뇌한 것이라고 했다.
또 서울강남·울산·제주·경기지역등 부동산투기지역내에 대지·임야·전답등을 사들여 타인명의로 은닉했고 축재한 재산을 장학재단으로 전환, 면세등 특혜조치로 일석이조의 재산증식을 했다고 지적했다. 발표문 한 귀절 한 귀절은 망신을 톡톡히 시켜야 한다는 의도가 넘쳐있었다.
그러나 미국내 빌딩매입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을 곁들이는등 「최선을 다한」흔적을 담았다.
떡고물파동이 일자 『떡을 만지다보면 옷에 떡고물을 묻힐수가 있는데, 그걸보고 「너 떡먹었지」하는 오해를 받을수도 있다. 그런 뜻에서 한 말이지 떡고물만 먹었다는 것이 아니었다』며 떡도, 고물도 안먹었다던 그의 해명은 결국 모두 부질없는게 됐다.
HR처럼 부정축재 조사를 「당당하게」요구했으면서도 연행·조사를 받은 또다른 인사는 박종규 전대통령 경호실장이다.
박씨는 계엄확대 4일전인 5월13일 공화당 탈당선언을 하면서 그가 권력을 이용, 부정축재했는지의 여부를 철저히 조사해줄 것을 관계기관에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는 『4월2일 귀국직후 최규하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취지의 조사요청을 했다』고 밝히고『그후 재삼 요청했으나 뚜렷한 반응이 없어 공개요청을 하는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내 스스로를 조사대상에 내놓음으로써 자율정화의 계기를 만들고 권력형 부패니하는 암이 우리 정치풍토에서 없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정치로 치부하여 공개할수 없는 사람, 국민 앞에서는 엄살을 떨고 뒤에 감춰둔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며 「진짜」는 따로 있다는 식으로 자못 톤을 높였다.
자신만만한 박씨는 『자율정화가 안되면 타율정화도 불가피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답변을 피하면서 『다만 새시대를 맞아 부패문제가 일단 정리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씨에 이은 박씨의 심상찮은 거동에 의아해하며 불길한 앞날을 점치기도 했고, 불과 며칠만에 이런 추리는 사실로 드러났다.
박씨와 가까왔던 Y씨(모대교수)는 『다혈질인 그의 성격에서 나온것이지 5·17낌새를 알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피스톨 박」이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직선적이고 화끈한 사람이다. 이 문제가 확대되고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오니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풀이했다.
Y씨는 『재벌들로부터 돈을 가져다가 박봉의 경호실 직원·경찰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대단한 축재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면도 있다』고 했다.
이와관련, 보안사 간부였던 H씨는 『원체 엄청난 돈을 떡 주무르듯 하다보니 자신이 가진 그 정도는 부스러기처럼 보일수 있었던게 아니냐』고 했고, 행정부에서 오랫동안 사정업무에 종사해온 L씨는 『기업등에서 돈을 거둬 적당히 물어주고 일부를 챙겨두는게 진짜「보스」라는 의식이 고의층에 만연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남들은 신군부 지도자들과 「각별한」박실장이 꽤나 혜택을 볼것으로 여겼읍니다. 전장군과 만나기도하니까 대단하게 보였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한때 뿐이었죠. 박실장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읍니다. 물론 외국을 나가는데 지장이 없는 점등도 당시로는 대단한 것일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박씨의 측근이었던 E씨의 얘기다.
E씨는 5월17일 밤 합수단 요원들이 대문밖까지 왔는데도 박씨는 사태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면서 연행직전 전장군에게 전화를 했으나 『그대로 응하시오』라는 답변밖에 듣지 못했노라고 했다.
박씨와는 비록 적지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신군무 리더들이었지만 새 시대 개막을 앞둔 시점에서 소문이 날대로 난 박씨를 제외시키기는 어려웠다.
『왜 그랬는지 박씨는 연행직후 「네가 박종규야」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먹과 발길질 세례를 받았답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박실장으로서는 더 큰 굴욕을 느꼈을 겁니다. 그는 풀려난 후에도 치를 떨었으니까요. 다른 인사들에 비해 그래도 「봐준게」있다면 나중에 학교(경남학원)를 돌려받은 정도라 할수 있을겁니다. 학교 자체가 박실장의 동생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 키워오기도 했지만 HR등이 육영재단등을 뺏긴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요. 그후 IOC위원등의 활동을 하게된 것은 실은 국제무대에서 일할 마땅한 체육인이 없어 박실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 뿐입니다.』E씨의 회고다.
그는 박씨가 조사를 받고 있던중 박씨의 인척이 참고인으로 소환되어 가혹한 취급을 받기까지 했었다고 했다. 또 박씨의 모친은 노환에 아들의 구금 소식이 겹쳐 6월12일 별세했다.
『합수단에 이 사실을 알리고 발인에나마 참석할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읍니다. 그렇지만 수사도중이어서 곤란하다는거예요. 그래 허화평대령에게 직접 사정을 설명하고 가까스로 「외박」(?)을 허용받았읍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나마 말입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S분실로 차를 보냈읍니다. 수사관 2명이 마산까지 줄곧 동행했지요. 여기서도 곧장 빈소에 들어갈수는 없었읍니다.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른다는거예요. 자정이 지난뒤 모든 문상객을 보내고나서 가족들만 지키는 빈소에 들어갈수 있었읍니다. 그때 박실장의 심경이야 오죽했겠습니까. 허용된 새벽4시가 되어 자리를 떠야했거든요. 모친의 빈소를 「쫓겨」나오는 박실장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용변을 봐야겠다고 한 모양이예요. 그것도 남의 눈에 띈다고 고속도로 휴게실을 피해 길옆에서….』 이렇듯 영욕이 엇갈린 세월을 살던 박씨가 숨을 거두자 5공화국의 「거물」들은 그의 빈소에 찾아와 눈물을 흘렀다.
또 그의 사후 집안내에서 재산배분 문제를 둘러싸고 이의를 제기하는등 분규가 일자 청와대 비서실관계자들이 중재에 나서기도 하는등 계속 보살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박씨 측근인사들이 말하는 별무 혜택 운운은 실제와 다른 점도 없지 않은 듯하다. 권력의 창출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희생」시켰지만 옛 정리를 보아 사후 구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예는 윤필용전수경사령관의 도공사장 보임과 윤씨를 구속했던 강창성전보안사령관(당시 항만청장)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구속시킨 경우에서도 찾을수 있다.
군을 「대표」했던 이세호씨는 모두가 그러했지만 특히 회한속에 비탄의 세월을 보낸 경우다.
신군부는 권력형 부정축재 문제를 처리하면서 군을 건드리기는 탐탁지 않았으나 제외시킬수는 없었다.
제3공화국이 군을 뿌리로 배태됐고 그런만큼 「군=권력」의 등식이 국민에게 깊이 심어져 있을 뿐아니라 군을 둘러싼 온갖 잡음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뽑힌게 이세호전육군참모총장이다.
최장수 육군참모총장(75년3월∼79년1월)으로서 군단장·주월한국군사령관·군사령관등 화려한 군경력을 가진 그는 경력만큼이나 요란하게 구설수에도 오르내렸다.
박정희대통령과 육사2기 동기생으로 승승장구해오던 이씨는 후배인 노재현씨(3기)의 후임총장이 되기전 수원근교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는 투서때문에 청와대 사정특보실의 극비 뒷조사를 받았었지만 이때는 조상이 물려준 땅이라고 밝혀져 별말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씨에게는 차지철대통링비서실장 주위를 맴돈다는, 군의 체통과 관련된 비난도 적지않았다. 그가 갑자기 바뀐것도 이런 분위기와 진급 심사에 관련된 추문때문이었다.
『금송아지가 많다고 했읍니다. 진급 심사와 관련해 챙긴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고요.』 (보안사출신 L씨)『1주일에 몇차례씩이나 차실장 방에 있는 것이 눈에 띄었지요. 대육군참모총장에 어울리지 않게…. 군인들은 이를 아주 언짢게 보았지요.』(예비역 육군대장 K씨)
그러는 가운데 권력의 주인이 숨을 거두고 그를 모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후배들이 힘의 주체가 되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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