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인간문화재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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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말에 판소리를 잘하는 8대 명창이 있었다. 특별히 어전에 뽑혀나가는 명창은「국창」이라 불렀고 그들에게는 명예직이나마 벼슬이 주어졌다. 통정대부·참봉·선달·오위장등 기막힌 특전이 베풀어졌다.
판소리의 예능 보유자 정광수할아버지(79세)의 긍지는 바로 이런데 있다. 적어도 10년간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야만 비로서 『창을 좀한다』하게되고 평생을 연구해도 끝이 없는 공부가 판소리라 한다. 명창들에 의해 다듬어진 사설과 곡조를 배워 높은 예술의 향기를 익혀야하고, 즉흥적이 아닌 심금을 울려 깊은 감동을 얼렁이게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법통잇는게 지름길>
그만큼 수련하기 힘들고 독자적인 스타일의 대성이 어려운 분야다. 양악계의 원로 김동진씨의 찬사가 새삼 생각난다. 『우리 음악 가운데 가장 음악성이 높은 것은 판소리다. 세계 어느 무대에 올려놔도 빠지지 않는다.』
판소리는 법통을 매우 중시하는 소리. 놀이로 흥청거리거나 재담으로 잠시 미혹하는 그런게 아니다. 소리꾼이 멋대로 엮어내는 날림소리가 돼서도 안되고, 5분 10분동안에 얄팍한 감성을 자극해 흥을 돋우는 노래는 더욱 아니다. 다분히 고전적인 명문의 법통 소리를 익히는것이 명창에의 지름길이다. 『춘향가』는 자그마치 4시간을 불러야한다. 자그마한 책한권의 분량이다. 『심청가』『적벽가』도 4시간씩 소요된다. 좀짧다는 『수궁가』『흥보가』가 3시간이 걸린다. 의관 정제하고 꼿꼿이 서서 몇시간씩 좔좔 암송하는 진짜 소리다.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예리하게 표출함은 물론이고 새소리·물소리·바람소리·천둥소리·짐승소리 같은 자연음의 음향과 웃음소리·한숨소리·울음소리 같은 미묘한 흉내까지 모두 성음화하도록 가르쳐왔다.
장시간 혼자서 하는 창이므로 많은 청중에게 사무치는 호소력이 없고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우선 재미있는 줄거리로 짜여져야 할것이고 듣기 지루하지 않도록 극적인 변화를 주어 엮어나가는 연출력을 겸비해야 한다. 그때그때 사설에 나오는 온갖 인물과 상황을 혼자 도맡아 연출하는 일인다역의 극적인 예술형태다.
『배창자 힘으로 퍼질러서 나오는 소리인데 목만 떽떽 부른다고 창이 되나요. 사람이 가진 본성음에 마탁이 많이 돼야 곡조화한 성음이 나오는 법이고 타고난 총기가 있어야 내용을 좔좔 암송하게 되죠!』
그게 보통 문장인가. 왕이나 사대부 계층에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양반문학에 속하는 내용을 상당히 담고있는 종합예술의 다양성을 부인할수 없다.
사설의 내용을 보면 한문투의 세련된 글이 있는가 하면 토속적인 잡가의 단편들을 모자이크한 부분도 꽤 엿보인다.
원래 판소리가 성립되는 과정에서는 재래종교의 무속적인 소리(무가)에 「들은 풍월 얻은 문장」이 곁들여짐으로써 독자적인 예술형태로 발전됐으리라 보고 있지만 긴 세월에 걸쳐 다듬고 닦이어 고전소설의 정수가 됐다는 국문학계의 지론도 귀기울일만하다.
사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유식한 한시·부·시조·가곡 등이 자유롭게 인용되었는가 하면 세간의 자질구레한 이야기(패관소설)와 염불·무당풀이·민요·덕담·속담까지 종횡무진으로 삽입돼 있는 것이다.

<명창유성준을 사사>
그래서 판소리를 사서삼경에 비견할만하다는 것이 정씨의 지론이다. 서민 대중은 비록 사대부처럼 사서삼경을 해독하지는 못하지만 판소리를 통해서는 권선징악을 분명하게 공감했던 까닭에 사회 윤리의 교재 구실을 넉넉히 해낸 셈이다.
『바탕글이 알기 쉽고 명창이 부르니 듣기 좋으면서 감명을 받으니 얼마나 교훈적입니까.』 나주 태생인 정씨는 정다산의 방손. 그의 판소리에 관한 관심은 국창이었던 조부 정창업의 영향일는지 모른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있었던 병자년의 전염병으로 조실부모하자 친척을 찾아나섰던 길에 창을 잘하는 한량을 만나 끝내 오위장의 교지까지 받은 국창으로 떨쳤다.
정씨는 물론 조부의 일을 까맣게 모르고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투전꾼을 보증섰다가 온 집안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풍파가 일어났다. 국민학교3학년 때의 일이다.
l5세의 소년은 창을 잘하면 귀인이 된다는 꾐에 솔깃했다. 인근에 사는 오씨의 사습을 받기로 했다. 우선 먹을 걱정을 않는 것만도 다행스러웠다.
17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5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한때는 목포권번(예기학교)에 들어가 선생노릇을 해보았으나 역시 기본이 미흡해 사퇴했다. 이미 19세에 성가한 터이지만 홀홀히 집을 떠났다. 장흥 보림사에 머무르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뱃속에서 소리를 마구 질러내 통성을 해보았고 몇날이고 몇달이고 목이 쉬어 잠기는 고통도 겪었다.
그런데 28세때 순천권번에서 그가 명창의 계보를 이어받은스승 유성준씨(당시 60여세)를 만났다. 남원태생인 그는 당시 판소리의 동편제 명창이었고 이론에 매우 밝아 명성이 높았는데 수궁가와 적벽가가 특히 장기였다.
『뵙자 「옳다 됐구나」했는데 그만 돈 많이 주는 진주권번으로 떠나시더구만요.그래 어떡합니까. 뒤쫓아 가서 특별지도를 해달라고 간청했죠. 원체 구식어른이라 성격이 팩팩하고선생한테 조금만 불손하면 처녀라도 종아리 때리는 분이었지요. 권번에선 예기를 수백명씩 교습하던 시절이라 개인교습을 집중적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지만 환심 살만한 일을 다해서 귀염받았군요.』
자기는 셋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점심 때가 되면 특별주문한 설렁탕을 대령해서 바쳐올리고 재산처럼 여기던 시계도 풀어드렸다. 더구나 그 선생을 봉변주려는 건달을 술로 달래는등 온갖 시중으로 정성을 다했다.
음악의 다른 분야와 달라서 대충대충이 통하지않는 것이 판소리요, 적당히 꾀를 써서 단기에 대성할수없는 수련과정이다.
17세기말 숙종 연간에 판소리는 종전과 달리 새로운 성음이 정립되었고 이때 12마당을 불렀다.

<1회 예시에 합격>
그것은 판소리가 놀이판으로 진출해 대중을 상대로 하는 독자적인 세계의 형성을 뜻한다. 그래서 한국 특유의 완성된 양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사설과 음악이 동시에 세련됨으로 말미암아 상류사회에서 즐기는 고급한 성악으로 승격됐으리라보고있다.
놀이판에서의 인기가 높아지고 상류사회의 잔치에 빠질수없는 기예로 성장됐다는 것은 곧 그들 명창의 식견이 상류사회에 대응하게 됐음을 암시한다. 사설의 내용이 한층 유식해지고 품위있는 문장으로 다듬어진만큼 예술적인 향기가 더해져서 배우기가 점점 까다로와지는 것이 순리다. 그래서 지망자가 많아질수록 군계일학의 명성이 값진 시절이었으리라.
1908년에는 왕실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져 창극이 판치게됐다. 의관이란 관직까지 제수받은 김창환명창이 주석이 되어 그밑에 송만갑·이동백·염덕준같은 판소리의 대가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그후 협율사가 조직되어 지방으로 활동무대를 넓혔고 서울에는 장안사·연흥사·광무대등의 상설극장이 생겨나 전성기를 누렸다.
판소리 중심으로 익선동에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된 것이 1932년. 정씨는 1939년에 상경하여 여기에 체류하면서 조선창극단·대동창극단·동일창극단에서 활동하는 길을 텄고 제1회 연예회시험에 합걱했다. 말하자면 이 분야의 자격고시와 같은 제도로 첫해 합격자는 김연수와 더불어 단 두사람 뿐이었다.
지방 순회공연중 의주에서 해방을 맞아 가까스로 서울에 돌아오자 불현 듯 고향 생각이 났다. 광주로 내려가 조강지처와 세 자녀와 함께 모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
『남원사또로 분장해 갈채속에 묻힌적도 있지만 다 덧없는 꿈이었지요.』
『광주이래로는 내내 후진을 교육하는 일에만 종사하고 있는데 역시 회의적일 때가 많군요. 일본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나니와부시(낭화절)는 수상도 무릎꿇고 듣는데 한국에서 판소리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란 너무합니다. 내 나라의 최고 음악이 어떻게 이토록 홀대받아야 되는지….』

<자기가락 만들어>
할아버지가 말끝을 흐림은 울먹임 때문이다. 그의 80평생은 판소리의 창법처럼 구슬프고 부드럽게 살았고 (계면조) 때로는 꿋꿋하고 장엄한채(우조) 어깨편적도 있었으며 혹은 너그럽고 화창한 (평조) 나날도 보냈다.
그는 장기간 교육자로서 종사해온 까닭에 교육자의 자격이며 판소리의 이론면에도 자기 신념이 확고하다. 즉 교육자는 목을 잘 쓰는 사람도 좋지만 인격적으로 덕망을 갖춰야 한다. 기예가 소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의범절 속에 있음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판소리」니 「다섯마당」이니 하는 용어를 극구 기피한다. 그건 전에 없던 말이요, 「창」「창악」이라 하든가「5 바탕소리」라 불러야 맞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본적인 5가사 이외의 『배비장가』『장끼타령』『옹고집타령』등은 중년에 꾸며 만든 것이라서 판소리의 정도에 포함시킬수 없노라고 한다.
그의 스승이 본시 기교와 수식이 적은 대신 풍부한 성량을 위주로하는 동편제 명창이었지만 그는 그 범주에 사로잡히려하지 않는다. 중요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된 그의 판소리는 스승의 법통을 따라 수궁가로 돼있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도 여러 법통소리를 보유하고 있다.
『춘향가』『흥보가』는 김창환제이고 심청가는 거기에 정응민제까지 참고하여 근래 오가사집을 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독자적인 자기스타일의 구축. 특정한 대목을 자기 나름으로 절묘하게 다듬어내는 더듬을 체득한데 있다.
그는 머리말의 자작 좌우명에 기록하되 『스스로 주색잡기를 경계하고 (자삼불혹) 티끌세상 번뇌를 씻고자 한다 (욕척진번)』그리고 호를 지어 양암금이라 낙관했다.
글 이종석(중앙일보출판기획위원 문화재전문위원)
사진 장충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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