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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미투가 인생을 건 도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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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홍지유 기자 중앙일보 기자
홍지유 사회부 기자

홍지유 사회부 기자

“전체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미투(#MeToo)’ 운동을 취재하며 가장 많은 시간 낭비를 한 영역은 ‘통계 찾기’였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연간 성폭력 피해 n건 중 처벌로 이어지는 사건 x 건’을 알아보려고 했다. 여성가족부와 경찰·법원 등에 접촉했지만, “전체 피해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답변만 들었다. 심지어 “추정치도 없다”고 했다.

경찰이 발표한 성폭력 피해 발생 건수는 연간 약 3만 건이다. 하지만 ‘3만’이라는 숫자는 성폭력 ‘발생’ 건수가 아닌 성폭력 ‘인지’ 건수라고 불려야 옳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는 대표적인 암수(暗數)범죄이기 때문이다. 여가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율을 2%로, 전문가들은 5~10%로 본다. 결국 경찰청 공식 통계보다 많게는 50배, 적게는 10배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식상한 말이지만,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선 정확한 실태 파악이 우선이다. 피해자가 30만 명일 경우의 대책과, 150만 명일 경우의 대책은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아 정확한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변명으로 손을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신고율이 왜 그렇게 낮은지에 대해서도 따져볼 볼 일이다.

여가부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의 대부분은 ▶피해가 심각하지 않다거나 ▶신고해도 소용없다는 판단 때문에 신고를 포기했다. 전자는 ‘별일도 아닌데 예민하게 군다’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후자는 수사 기관에 대한 낮은 신뢰도 문제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신고하지 않아 피해가 묻히고, 피해가 묻힐 게 뻔해 신고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이다. ‘해바라기센터’와 ‘여성의 전화’ 등 성폭력 피해자 구제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유로는 전체 응답자의 14%가 ‘관련 기관의 존재를 몰라서’를 꼽았다.

이번 기회에 침묵의 문화를 끝내야 한다. 미투 운동에 동참한 여성들은 대부분 SNS에 가해자와 본인 모두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한 글을 올렸다.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취재 중 어렵게 만남이 성사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직장을 그만둘 생각으로” “업계와 등질 각오를 하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고 했다.

미투가 인생을 건 도박이 돼서는 안 된다. 누구든 나의 의사에 반해 내 몸을 만질 수 없게 해달라는 것이,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회사에서 잘릴 걱정 없이 신고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홍지유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