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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25% 관세 폭탄' 트럼프, 무역전쟁 방아쇠 당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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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국산 세탁기 등에 ‘관세폭탄’을 매기는 통상법 201조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서명식을 마치고 이를 공개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국산 세탁기 등에 ‘관세폭탄’을 매기는 통상법 201조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서명식을 마치고 이를 공개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트럼프발 보호무역주의에 세계 통상질서 요동 

통상 전문가인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확신범적 보호무역주의자’라고 정의한다. 자유무역이 미국의 일자리를 뺏어가고, 무역적자를 악화시키며, 미국인에게 주는 혜택은 없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무역에 대한 불신이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인 올해 들어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해외산 제품에 무차별 ‘관세 폭탄’을 매기는 형태다. 미국 입장에서 이익이 되는 이런 정책에는 피해를 보는 상대국이 있다.

자연히 반발을 불러온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발(發) 무역 전쟁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최근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회원국 간의 무역 전쟁 가능성이 위험 수준”이라고 경고한 것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를 우려한 것이다.

아제베두 사무총장은 “미국이 과거 세계 무역에 대해 품었던 ‘건설적인 기상’이 그립다”며 미국의 보호무역 행보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년 차가 시작되는 첫 주였던 지난 1월 23일(현지시간) 외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해 최대 50%의 관세를 매기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했다.

보호무역 전쟁 선포 

본격적인 보호무역 전쟁 선포로 풀이된다. 미국이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건 지난 2002년 이후 16년 만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일 백악관에 철강사 대표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수입규제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일 백악관에 철강사 대표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수입규제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철강 수입이 미 안보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한국과 중국 등 12개국에서 수입하는 철강에 53%의 관세를 물리는 방안이 들어있었다.

또 모든 철강 수입 제품에 24%의 일률 관세를 부과하거나, 모든 철강 수입을 지난해 수준의 63%로 제한하는 방식도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중 일률 관세 부과 방침을 밝혔다. 1일(현지시간) 미국 내 철강ㆍ알루미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대신 상무부 안보다 높은 25%의 세율을 매기기로 했다. 자국 철강 산업 보호를 위해 안보를 명분으로 관세 폭탄(또는 수입량 할당)이라는 보호무역 카드를 꺼내 든 셈이다.

부시 행정부의 이코노미스트 출신이자 시카고 카운슬 국제문제협의회(CCGA) 무역 전문가인 필 레비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에 대해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문을 연 것”이라며 “글로벌 무역 전쟁의 포문을 연 셈”이라고 말했다.

미국 철강시장에서 수입물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27.5% 수준이었다.(왼쪽) 수입물량 가운데 16.1%가 캐나다산으로 가장 많다. 자료=미 상무부

미국 철강시장에서 수입물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27.5% 수준이었다.(왼쪽) 수입물량 가운데 16.1%가 캐나다산으로 가장 많다. 자료=미 상무부

중국의 강력 반발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건 미국의 주 타깃이 되는 중국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달 28일 의회에 제출한 ‘2018 무역정책 어젠다ㆍ2017 연례 보고서’에서 “미국은 중국의 국가주도 경제모델이 국제 경쟁력을 침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에 대한 고강도 무역 압박 방침을 재차 천명한 셈이다.

중국 당국은 무역확장법 보고서가 공개된 다음 날 “보고서가 근거가 없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미국의 최종 결정이 중국의 국익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관영 매체인 인민일보와 환구시보 등은 “미국 국채 매입 중단 카드, 중국 내 미국 기업에 대한 덤핑 조사 개시와 벌금 부과 등의 맞불 대응을 펼쳐야 한다”고 구체적인 ‘보복’ 방법까지 제시했다. 미국과 중국 간 지식재산권을 둘러싼 분쟁은 ‘태풍의 눈’이다.

 지난해 8월부터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현황을 조사하고 있는 미국은 스페셜 301조 발동을 여러 차례 경고해 왔다. 이래서 G2(주요 2개국ㆍ미국과 중국) 간 본격화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11월 9일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회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9일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회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선은 유럽연합으로 확대 

전선은 G2뿐이 아니다. 유럽연합(EU)은 미국의 무역확장법 보고서와 관련해 “미국의 무역 제한조치로 인해 수출이 영향을 받을 경우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EU가 보복 조치로 미국산 할리 데이비드슨 오토바이 및 버번 위스키에 대한 관세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다소 나아졌지만 세계 경제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자국 시장을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 밖뿐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정책에 대한 반발 기조가 있긴 하지만 자유무역을 기피하는 트럼프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극히 작다는 분석에서다.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법인세율 인하에 따른 국내외 기업 유치와 보호무역 조치를 통한 자국 산업 보호가 성과를 나타내고 있고, 지지층으로부터도 호응을 얻고 있다고 트럼프는 생각한다”라며 “앞으로도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고 상무부 등 행정 조직이 이를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글로벌 무역의 방향은 당분간 트럼프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크다. 최대 라이벌인 중국 역시 미국의 일련의 조치에 대해 반발하긴 했지만 당장 ‘무역 전쟁’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최근 미국산 닭고기에 부과해온 반덤핑관세를 최근 8년 만에 철회하는 등 미국에 대한 대응 경고와 함께 유화 제스처도 동시에 보내고 있다. 게다가 WTO와 같은 다자 무역체제도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앞에서 힘을 잃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AP=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AP=연합뉴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장기 집권을 꾀하는 등 중국의 최근 국내 여건상 당장 미국과 통상 문제로 ‘강 대 강’ 대결을 벌어진 않을 것”이라며 “WTO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당분간 세계 통상질서를 주도적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한국 

한국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국이 발동한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는 한국 기업이 타깃이 됐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산 철강에 2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힘에 따라 국내 철강 업계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최근에는 호혜세(reciprocal tax) 카드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ㆍ중ㆍ일 등은 우리 기업들의 상품에 막대한 관세를 물리고 있는데도 미국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산 제품에 다른 국가가 매기는 만큼 해당 국가 상품에 수입 관세를 매기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과 맞물려 협상력 강화를 위해서도 미국의 통상압박은 계속될 전망이다. 게다가 보호무역 확산 기조 속에 다른 나라와의 무역 갈등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해 중국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 그 예다.

상대적 약자인 한국으로선 대응이 쉽지 않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은 “경제 논리만으로 통상 압력 문제를 풀 수 없다”라며 “통상은 물론 정치ㆍ외교적 이슈를 고려해 청와대가 나서서 종합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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