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 아픔보다 정신적 고통의 나날|「5·18」부상자들의 현주소|대부분이 총상·곤봉등에 맞아|아직도 외상 후유증·정신 질환|"불온분자"낙인… 명예회복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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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차라리 그때 뒤져뿌렀으먼(죽어버렸으면) 이 고생을 안허는디 허는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번씩 허지라우.』
「불온분자」라는 당국의 따가운 감시의 눈길속에서 육신의 아픔보다 더한 마음고통으로 8년간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광주사태 부상자들.
이들중 상당수는 아직도 병원을 드나들고 있으며 모두가 몸이 쑤시는 등의 후유증으로, 특히 뼈를 다친 사람들은 궂은 날이면 거동을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속을 헤맨다.
총상으로 눈이 먼 사람은 보호자의 도움없이는 외출도 못하고 계엄군이 내려친 소총개머리판이나 곤봉에 맞아 정신이상이 된 4명은 아직도 정신병원 등에 입원해 있다.
현재 공식집계된 광주사태 부상자는 8백58명.
이밖에 부상자동지회에 신고된 사람이 2백여명이며 『가족들에 대한 감시가 두려워 신고를 안한 경우까지 계산하면 적어도 2천5백명, 많으면 3천∼4천명은 될 것』이라고 부상자 동지회측은 보고 있다.
민주화바람이 불면서 요즘도 매일 1∼2건씩의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는 것.
이들은 한결같이 계엄군의 「진압」과정에서 「당했기」때문에 총·대검·곤봉등에 맞거나 찔린 사람들.
『이 에미의 고통을 하늘이나 알지 누가 알겄소, 누가보상하겄소.』
80년5월 광주의 참극후 정신이상증세로 여지껏 서울 용인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신모씨 (26)의 홀어머니 이순금씨(62).
피눈물로 지샌 8년이었다. 이씨와 3남4녀의 집안은 이 사태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신씨는 당시 농고2년생. 5월20일 저녁 트레이닝차림으로 광주문화방송앞길에 나갔다가 계엄군이 휘두른 소총개머리판에 오른쪽 앞머리를 맞았다. 당시 신씨는 비무장이었다.
깨진 머리가 쑥 들어가 플라스틱으로 때우는 대수술을 받았으나 정신이상이 되어버렸다.
막내인 신씨는 집안의 희망이었다. 가난으로 두 형을 가르치지 못한 모친은 총명했던 신군만은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려 식모살이로 돈을 모으며 발버둥쳤던 터였다.
사태후 생사불명상태에서 20일 후에야 군병원에서 신군을 찾아낸 가족들은 할말을 잊었다. 1년에 한두달 집에 데려다 놓으면 소리소리 지르며 온갖 물건을 부수는 발작에 가족들은 오늘도 피가 마른다고 했다.
박병준씨 (27·무직·광주시월산동). 80년5월27일 새벽5시의 일이었다. 『따다다당』-진압군의 요란한 총성이 전남도청을 휘감았다. 도청본관을 지키던 박씨와 동료들은 조준 발사되는 자동소총앞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4일뒤 그는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양쪽다리에 5발을 맞아 왼쪽다리는 절단된 상태였다. 양복점 직공이었던 박씨는 83, 84, 85년 연속으로 재수술을 받았으나 오른쪽 발목을 제대로 못쓰는 등 후유증이 계속돼 특수수술을 해야하나 비용문제로 포기상태.
결혼은 꿈도 못 꾸고 포장마차를 하는 노모의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김용안씨 (26·상업·광주시농성동625)의 경우. 숭실고 3년생이었던 김씨는 5월20일밤11시 광주역광장에서 시위를 하다 변을 당했다.
5명의 군인에게 붙잡힌 김씨는 피투성이인 채로 3시간동안 길바닥을 질질 끌려 다니며 중상을 입었다. 그때 그는 지옥을 보았노라고 했다.
그는 끌려 다니며 대검에 왼쪽다리를 칼끝이 반대편으로 나올 정도로 3∼4차례 찔리고 머리등 전신을 곤봉으로 두들겨 맞다 기절, 뇌수술등 4개월간의 입원치료를 받았다. 『육신의 아픔보다는 폭도로 몰린데 따른 정신적 고통이 더 컸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5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던 신경진씨 (34·인쇄업·광주시림동142). 신씨는 5월17일 금남로 가톨릭센터앞에서 시위를 하다 2명의 계엄군에게 잡혀 오른쪽 다리를 대검에 찔리고 곤봉에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어깨에는 쇠가 넣어져 있어 항상 몸이 쑤시는 고통을 받는다. 인생항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지금껏 생계에 허덕인다.
주암순씨 (52·여·광주시유동61)는 지프에 치여 다리·갈비뼈·골반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5월21일의 일이었다.
주씨는 신고할 줄도 모른 채 자비 1천여만원을 날려가며 치료하다 85년에야 신고, 의보카드를 받았다. 지난달 20일 세번째 수술을 받았으나 완쾌되지 않은 상태.
당국은 80년당시 신고를 한 부상자 8백58명에 대해 치료비를 지원해주고 이중 4백79명에게 의료보험카드를 발급했다. 80년 1백24명에게 성금으로 모아진 2백만∼3백만원을 지원했으며83년 지역개발협의회에서 이들에게 4백만∼1천만원씩을 지급했다. 84년엔 또다른 34명에게 2백만∼1천만원씩을 지원했으나 보약·특수약품값등 아직 물질적 보상마저 불충분한 상태다. <광주=위성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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