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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지식 농경사회와 천재무용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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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성기완 시인·밴드 앗싸 멤버·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성기완 시인·밴드 앗싸 멤버·계원예술대학교 교수

퇴근 시간의 전철 간이다. 다들 고개를 처박고 핸드폰을 보고 있다. 저마다 무작위의 오솔길을 따라 무료한 산책을 하고 있다. 나 역시 하이퍼링크로 건너뛰며 우발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구경한다. 이건 그야말로 구경이다. 보고 있는 걸 보는 순간 망각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할아버지가 신문을 접는 바스락 소리와 함께,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소수 천재가 지식 생산하고 독점하던 시대의 종말 #빅데이터에서 누구나 찾아 쓰는 정보로 변한 지식

옛날, 어느 어른의 서재에 슬쩍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어두침침하고 서늘한 게 적막감이 들면서 어딘지 깊은 숲속에 들어온 기분이라 두려움을 느꼈다. 책들은 과묵하게 오랜 세월을 묵어 신 김치 비슷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시큼한 숲속에서 나 홀로 길을 잃어본 적이 없으면 공부한다 할 수 없겠지. 빳빳한 흰 종이에 파란색 줄이 처져 있는 메모카드의 왼쪽 위 귀퉁이가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링으로 끼워져 있었다. 허락도 없이 몇장을 넘겨봤다. 어른의 필체는 빠르고 멋졌다. 진한 블루 블랙 잉크를 넣은 만년필로 적어 놓은 단어라든가 개념, 연도, 작게 붙여 놓은 신문 스크랩, 책의 페이지 등등 제멋대로였다. 몇 번을 꾹꾹 눌러 반복해서 써놓은 물음표는 파란 줄을 세 칸쯤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 갈고리같이 생긴 물음표는 내 기억 속에 박혀 있다. 물음표가 무기였을까. 책이 숲이라면 메모카드 속은 숲속에 출몰하는 동물의 세계였다. 물음표의 낫으로 지식의 동물들을 사냥했던 것인가. 메모카드의 위쪽에는 본인만이 식별 가능할 분류기호들이 쓰여 있었다. 이를테면 바-11-q, 뭐 그런 식. 암호 같았다. 가죽 벗겨진 동물들이 저마다 번호표를 달고 가지런히 걸려 있다. 파리해 보이던 그 어른은 잘 훈련된 사냥꾼이었던 것인가.

그 어른은 누구에게도 번호표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 사냥꾼은 어느 시간 어느 길목에 어떤 동물이 나타나는지 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잠복해 있었다. 운이 대통하면 호랑이를 메고 숲을 나올 것이고 보통 날이면 토끼나 다람쥐 여남은 마리를 꿰차겠지. 사냥감들을 모아 영감의 숯불을 지펴 요리하면 어느 날 두껍거나 얄팍한 책이 되어 세상에 던져지겠지.

이게 옛날 지식 채집 방식의 풍경이다. 문자 발명 후 수천 년 동안 이런 식이었다. 이 시기는 지식의 수렵 시대라 할 수 있다. 수렵 시대에는 능력자들이 먹고산다. 사마천이나 헤겔 같은 천재 사냥꾼들은 자기만의 사냥법이 있었다. 채집사회에서는 천재들이 지식사를 채운다. 철학이며, 과학이며, 예술이며, 다 천재들 판이다. 권력은 천재들을 써먹는다. 그게 집단화되면 엘리트가 된다. 지식을 어떤 사람들만 소유하게 된다. 제국주의가 정당화된다. 누군가를 지배하며 너희는 어리석어,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시대는 갔다. 물음표의 날은 검게 녹이 슬어간다. 아무도 정성 들여 자기만의 메모카드를 작성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저장된 정보를 활용한다. 이른바 ‘빅 데이터’, 익명의 다수가 마이크로초 단위로 작성하고 수정하는 거대한 정보의 곳간에서 일용할 양식을 ‘불러낸다’. 그건 마치 저장고에 쌓인 곡식에서 한 줌을 퍼오는 것과 같다. 이것이 지식 농경사회의 풍경이다.

지식 수렵 사회에서 지식 농경 사회로의 거대한 이행. 전자가 소수 강자의 사회라면 후자는 다수 약자의 사회다. 수렵사회는 신나고 위험한 반면 농경사회는 따분하고 안전하다. 재미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 농사를 지어 별처럼 무한한 낱알들을 털어낸다. 일부는 먹고 나머지는 저장한다. 디지털 농경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저장고의 익명성을 지향한다. 아무도 독차지할 수 없고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다. 심지어 인공지능(AI)의 시대다. 사람 없이도 지식이 자동적으로 쌓이고 발전한다. 자동 증식하는 지식은 천재보다 더 천재다. 지식 농경사회가 되자 천재가 쓸모없어진다. … 다시 전철 간이다. 모두 목이 구부정하다.

성기완 시인·밴드 앗싸 멤버·계원예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