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2만불 시대의 시민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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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가 사는 아파트 동네는 5000가구가 넘는 대단지다. 산동네를 재개발해 지은 단지이다 보니 진입로가 불편하다. 늘 우회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쪽은 늘 붐빈다. 주민들의 청원이 빗발치자, 차 두 대가 오갈 정도의 도로를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새 도로는 쓸모가 없어졌다. 도로 양변에 불법주차가 늘어났고, 이 도로에 들어섰다가는 차가 엉켜 10여 분 이상 꼼짝하기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 앞의 도로는 편도 1차로다. 시내버스와 마을버스가 다니는 이 좁은 도로는 보행도로를 점거한 상품진열대와 불법주차로 뒤엉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은 시민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분노들이고, 신문을 장식하는 우울한 사건들 못지않게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이런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는가'라는 불충(不忠)한 질문도 하게 된다. 시민들은 기초단체장들의 직선제가 '눈치 보기'와 무질서를 낳았다고 흥분하기도 한다.

요즈음 신문을 펼쳐 들면, 정치적 냉소주의와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 하늘을 찌를 정도다. 새만금 사업, 한.미동맹과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정치권의 비리, 8.31 부동산대책 등의 거대 정책과제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꼭 필요하고, 이에 대한 정보가 시민에게 전달되고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도, 언론도, 정치권도 일상의 작은 부조리에 대해서는 불감증이 심하다. 오랫동안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나는 한 달 사이에 도쿄(東京)와 홍콩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좁은 땅과 밀집한 인구라는 점에서 서울과 유사하지만, 산책을 나간 밤거리에서 나는 불법주차된 차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두 번이나 일본을 이겨도, 아무리 한류가 일본을 휩쓸어도 여전히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라는 점을 실감하곤 한다. 이제 우리도 거대한 사회적 불의에 맞서는 것 못지않게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정의를 실현하고 2만 달러 시대를 맞이하는 국민으로서의 품격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는 왜, 여전히 시민이 갖춰야 할 덕목이 자리 잡지 못하는가. 이와 관련해 능력에 따른 출세와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서구의 시민계급이 실행한, 엄격하고 치열한 엘리트 교육과 그것의 하향적 영향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존경받는 지도력이야말로 시민에게 자조(自助)와 체통을 가르치는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도 하버드대학은 기숙사 생활을 의무화하고 있고, 튜터 제도나 연중 내내 진행되는 운동경기 등을 통해 집단생활과 공정한 경기의 정신을 훈련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여전히 우리 교육은 성장과 출세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교육이 가르쳐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이나 인문학적 소양은 축소되고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교육 못지않게 일상생활을 재조직하려는 시민계급의 끈질긴 노력이 새로운 의식구조와 생활방식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을 환기하면, 우리 사회에서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일상생활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거대정책의 감시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을 성찰하려는 노력, 그 일상성에 은닉된 미세한 권력관계나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작은 실천들이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일어나야 하고, 이것이 시민들 사이에 폭넓은 사회적 합의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작은 분노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공권력 역시 권위주의나 '눈치 보기' 사이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체통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체통과 품격이 있는 사회, 일상의 분노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치열한 노력이 국민소득 몇천 달러를 올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아니겠는가.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