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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태산 같은 빚만 남기고 간 막내 남동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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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38) 채정애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1959년 여름 어머님 품에 안겨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찍은 사진이다. 나는 1958년 개띠해에 채씨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오매불망 아들만을 고대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나자 또 딸이란 것을 알게 되자 화가 나서 낚싯대를 들고 집을 나가셨다고 한다.

다행히 이웃집 아줌마가 우리 집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니 웬일인가 들여다보고 해산으로 지치신 어머님을 챙겨주셨다고 한다.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예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버지가 주상전하만큼이나 무서웠었다.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아마도 심부름시킬 때 대답한 것이 전부인 것 같다. 딸만 키우느라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1964년 내가 일곱살 되던 해 드디어 다섯 번째 만에 아버지의 꿈과 희망인 남자애가 태어났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갓 돌을 지난 아이가 당시 불치병이라는 뇌막염에 걸렸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일상은 전부 어렵게 얻은 아들의 병환에 몰두했다.

째지게 가난했던 그 세월에 빚에 빚을 이어가며 몇 년 동안 전국각지로 소문난 의원을 찾아다니다 보니 집에는 철부지 어린 딸들만 살게 됐다. 당시 큰언니가 12세, 둘째 언니가 10세, 내가 7세, 여동생이 4세였다. 그야말로 기막힌 유년시절이다.

반백 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를 더듬어보면 그 처참한 광경이 영화필름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마도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정답인가 싶다. 몇 년간 부모님의 애타는 노력과 고생의 보람도 없이 아들은 결국 소아마비 불치로 선고받았고 10년 한을 가슴에 품고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가족은 태산 같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사진은 1968년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마을 학생들의 왕이었던 둘째 언니가 여학생들을 동원해 재활용 비닐을 모아 판돈으로 찍은 마을 여학생들의 기념사진이다.

1972년 초등학교 졸업을 전후해 우리 마을에는 3년 연속 수재가 들어 옥수숫가루 푸대죽으로 근근이 연명했다. 1973년 봄, 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엄마와 큰언니의 동조 하에 가까스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돈이 없어 곧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위기감에 조금이나마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식사를 반으로 줄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몇 개월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심한 영양부족으로 폐결핵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 병은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다. 더욱이 돈이 없는 집안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꿈이 아니면 기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엔 학업을 중단하기도 하면서 가난이 준 그 병을 20여년 동안 앓으면서 극심한 고통과 싸우면서 끈질기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진은 1972년 겨울 5년제 초등학교 졸업 기념사진이다. 반백 년이 흘러 비록 몇몇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 속에 잡아두지 못했지만 보고 싶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모두가 부디 건강하기를 빌어본다.

1988년 여름 어느 날로 기억한다. 우리 시골 마을에 어쩌다 사진기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준비해 네 살 먹은 아들을 안고 나갔는데 한산한 시골이라 배경이 마땅치 않았다. 살펴보던 중 우리 집 배추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파란 배추밭을 배경으로 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게 됐다.

1990년 설 후에 친정집에 나들이 갔다가 눈 내리는 날 가족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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