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원본-복제본 동일한지 검사가 입증 못하면 증거부정”

중앙일보

입력

법원에 제출한 디지털 증거(복제본)가 실제 원본과 같다는 사실을 수사당국이 입증하지 못하면 증거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상 조세포탈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모(44)씨에게 징역 2년6개월과 벌금 90억원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USB 원본과 복제 CD 동일성 증명해야 #‘이미징’ 참여권 수사실까지 보장 안돼 #압수목록은 서면 아닌 이메일 송부 가능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김씨 등 3명은 2012년~2014년 부산의 한 유흥주점을 운영하면서 가짜 장부를 만드는 등의 수법으로 세금을 포탈했다.
이에 수사기관은 수사에 나섰고, 영장을 발부받아 유흥주점과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 업소 경리 이모씨의 USB를 찾아냈다.
그 안에는 조세포탈 장부가 담긴 파일로 추정되는 엑셀파일 등이 있었다. 검찰은 범죄혐의와 직결되는 파일을 선별한 뒤 이미징(복제) 작업을 해 이를 CD와 출력물 형태로 법원에 제출했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쟁점은 검사가 제출한 CD 내 주요 파일(‘판매심사 파일’)과 그 출력물을 유죄 인정을 위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다. 디지털 전자문서를 담은 파일 등의 경우, 특정한 기술에 의해 그 내용이 편집ㆍ조작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본으로부터 복사한 사본일 경우에는 복사 과정에서 편집되는 등 인위적 조작없이 원본의 내용 그대로 복사된 사본임이 증명되어야만 증거능력이 있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그러한 증명이 없는 경우에는 쉽게 그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위적 조작 없이 원본을 그대로 복사ㆍ출력한 것이라는 사실은 증언이나 진술, 기술적(해시값 등) 비교ㆍ검증 결과 등을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다.

다시 이 사건으로 돌아가 보면, CD에는 이 사건 ‘판매심사 파일’을 포함해 4458개의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감정결과에 의하면 이 파일들은 복제 작업을 거친 이미지 파일이 아니었다. 원본인 USB 파일과 동일한 형태의 파일도 아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원본 파일(USB 파일)이 어떤 형태의 변환 및 복제 등을 거쳐 CD에 일반 파일 형태로 저장된 것인지를 확인할 자료도 제출하지 않았다.
또 기술적 비교ㆍ검증을 해봐도 원본과 복제본 중 20개 파일의 해시값(파일 특성을 축약한 암호 수치)은 동일하지 않았다.

이에 대법원은 복제본(CD 및 그 출력물)의 생성ㆍ저장된 경위에 대해 아무런 증명이 없는 파일은 압수 집행 당시가 아닌 그 이후에 생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원본과의 동일성은 증거능력의 요건에 해당하므로 검사가 그 존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배제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디지털 증거의 원본 동일성에 대하여 검사에게 주장ㆍ증명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한 판결”이라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그 증명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증거능력을 부정한 첫 사례”라고 말했다.

더불어 대법원은 영장 집행 현장에서 복제ㆍ압수할 당시 피의자 참여권이 있을 뿐 이후 수사기관 사무실에서까지 입회 참여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압수한 목록은 꼭 서면으로 피의자에게 전달할 필요는 없고, e메일로 전송하는 등의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는 최초의 법리가 나왔다는 데도 판결의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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