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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메밀꽃밭, 188대 장구 굉음 … 미디어아트 대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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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와우 포인트(놀랄 만한 장면)’가 있다”던 송승환 평창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의 예고는 현실이 됐다. 9일 밤 열린 개회식은 오래도록 기억될 명장면을 여럿 남겼다. 첨단 현대 기술을 이용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장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까. 개회식 제작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다시 보는 개회식 명장면 #별자리지도는 TV시청자만 감상 #한국인 흥 살린 ‘ㄱㄴ춤’‘야호춤’ #예술감독들 “폐회식도 기대하라”

1395년 제작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증강현실 기술로 올림픽스타디움에 펼쳐보였다. TV 시청자들에게만 보인 장면이다. [중계화면 캡처]

1395년 제작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증강현실 기술로 올림픽스타디움에 펼쳐보였다. TV 시청자들에게만 보인 장면이다. [중계화면 캡처]

올림픽 개회식에서 600년 전에 만들어진 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를 눈앞의 영롱한 별자리로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 별자리가 입체 영상으로 올림픽 스타디움을 순식간에 감싸 안은 장면은 이번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이 별자리는 막상 개회식이 열린 현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 효과로 화면을 통해 가상의 별자리를 겹쳐 보이도록 연출했기 때문이다. 올림픽 개회식을 TV로 지켜본 전 세계 시청자들을 위한 서비스였던 셈이다.

예술감독들

예술감독들

이번 개회식은 첨단 기술로 빚은 ‘미디어아트의 대향연’이었다. 미디어아티스트인 목진요 영상감독의 활약이 컸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무기로 그는 스타디움에 하얀 메밀꽃을 출렁이게 하고, 빛 기둥을 쏘아올리고, 태극 문양을 수 놓았다. 그는 무대 바닥과 사람과 사물 등의 표면에 영상을 비추기 위해 2D, 3D 디지털 이미지를 제작하고 연출하는 전 과정을 책임졌다. 목 감독은 “아티스트 입장에서 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인력 등 다소 부족한 부분을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으로 덮은 부분이 없잖다. 여러분이 좋게 봐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 개회식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힌 메밀꽃밭 장면. 공연의 주인공인 강원도 다섯 아이를 태운 뗏목이 디지털 메밀꽃밭 위로 유유히 흘러간다.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활용해 연출했다. [뉴시스]

2018 평창겨울올림픽 개회식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힌 메밀꽃밭 장면. 공연의 주인공인 강원도 다섯 아이를 태운 뗏목이 디지털 메밀꽃밭 위로 유유히 흘러간다.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활용해 연출했다. [뉴시스]

정선 아리랑 노랫가락과 함께 다섯 아이를 태운 뗏목이 넘실거리는 메밀꽃밭 위로 들어온 장면 역시 이날 개막식의 장관이었다. 바람에 눕고, 비를 맞아 꺾이고, 짓밟혀 이지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꽃피우는 메밀밭을 섬세하게, 시적으로 표현했다. 목 교수는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을 가장 서정적인 장면으로 꼽는데, 사실은 우리 민족의 고된 근현대사를 서사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며 “메밀밭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3D 이미지”라고 설명했다.

장구춤을 추는 출연자들. 김백봉류 장구춤의 자유로움과 에너지를 통해 태극의 4괘를 표현했다. [연합뉴스]

장구춤을 추는 출연자들. 김백봉류 장구춤의 자유로움과 에너지를 통해 태극의 4괘를 표현했다. [연합뉴스]

목 감독이 가장 애착을 갖고 완성한 것은 스타디움에 태극의 힘을 표현한 맵핑 작업이었다. 장구 연주자들의 옷 색깔이 순식간에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바뀌며 태극으로 바뀌는 장면을 만들어낸 것. 그는 “이리저리 외력에 의해 휘는 곡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힘을 지닌 강력한 태극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태극 전환 장면은 원일 음악감독도 힘을 준 대목이다. 장구 합주곡을 작곡한 그는 “천지인의 원리를 선언적 외침 소리로 구현하면서, 한국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 장면에는 장구 연주자 188명과 무용단 200명이 출연했다. 원 감독은 3분 14초짜리 음악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인트로’와 ‘자진모리’ ‘휘모리’로 구성했다. 연주자들이 한 목소리로 “하늘”과 “땅”“사람”을 외치고 사이사이 장구 188대가 ‘꽝’하고 울린 인트로 부분부터 강렬했다.

그는 처음부터 장구 합주의 효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장구는 양쪽이 음과 양으로 돼 있는 악기이며 한국적 타악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연주자는 젊은이들로 구성했다. 국악고·선화예고 학생들이 장구를 잡았고 무용수들은 각 대학에서 모집했다. “가장 전통적인 것을 최대한 경쾌하고 희망차게 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일산의 물류창고를 빌려 연습하며 리듬을 맞췄다. 상모를 돌리자는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바람 문제로 생략했다.

선수단 입장이 진행되는 동안 자원봉사자들이 가요 메들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AP=연힙뉴스]

선수단 입장이 진행되는 동안 자원봉사자들이 가요 메들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AP=연힙뉴스]

원 감독은 장구 합주뿐 아니라 애국가, 선수단 입장 음악, 남북 공동선수단 입장 음악 등을 총괄했다. 그는 “평균 기온이 굉장히 낮았기 때문에 음악엔 열기가 있어야 했다”라며 “특히 선수단 입장 음악은 각 세대를 아우르는 한국의 가요를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형식으로 편곡했다”고 했다. 그 결과 선수들이 흥겹게 춤을 추며 입장했다. 한국식 독특한 리듬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된 자리였다. 선수단이 입장하는 동안 100명의 자원봉사자가 무대 가운데 둥그렇게 서서 1시간가량 쉬지 않고 춤을 춘 장면도 화제다. 차진엽 안무감독은 “흥에 초점을 맞췄다. 멀리서도 움직임이 잘 보이도록 팔을 크게 움직이는 동작을 많이 넣었다”고 설명했다.

현대무용가인 차 감독으로서는 그동안 해왔던 작업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었다. 연습 기간은 단 열흘. 무용수가 아닌 일반인들이 모자·장갑까지 갖춘 방한복 차림으로 춤꾼 자리에 선 것이다. 차 감독은 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동작 일곱 개를 추려 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안무를 짰고, 동작마다 ‘ㄱㄴ춤’ ‘야호춤’ 등의 이름을 붙여 기억하기 좋도록 했다. 배경 음악으로 ‘강남스타일’이 나올 때만 말춤을 집어넣어 따로 안무를 했다. 쉬운 안무 덕이었을까. 자원봉사자들은 흥겹고 신나게 춤을 췄다. 차 감독은 “리허설 때부터 꽤 추웠는데도 봉사자들이 의미를 생각하며 즐겁게 참여해줘서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 가을부터 개폐회식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폐회식은 더 기대해도 좋다”고 귀띔했다.

이은주·이지영·김호정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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