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방사선사로 20년 일하다 백혈병…법원 "업무상 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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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을 이용하는 CT기기.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방사선을 이용하는 CT기기.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20년 동안 병원에서 방사선사로 일한 뒤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린 남성에게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단독 이승원 판사는 전 방사선사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장기간 방사선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렸거나 적어도 방사선 피폭이 하나의 발병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보고 근로복지공단이 황씨에게 요양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2일 판결했다.
20년 동안 한 병원에서 매주 5일을 방사선사로 일해온 A씨는 일을 그만둔 지 5년 만에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혈액세포를 만들어내는 세포에 문제가 생겨 골수 안에 비정상적인 세포가 과도하게 늘어나는 병으로, 주로 30세 이상에서 나타나고 성인 백혈병의 25% 정도를 차지한다. A씨는 “방사선사로 일하며 지속적으로 방사선에 노출돼 걸린 병이다”면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방사선 노출과 만성 골수성 백혈병 사이의 인과확률은 11.83%다. 방사선 노출과 발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이에 불복한 A씨는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성숙된 과립구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병으로, 주로 중년층과 노년층에서 발생한다. 사진은 환자의 말초혈액을 염색하여 1천배로 촬영한 모습. [중앙포토]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성숙된 과립구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병으로, 주로 중년층과 노년층에서 발생한다. 사진은 환자의 말초혈액을 염색하여 1천배로 촬영한 모습. [중앙포토]

법원은 변호사도 없이 홀로 소송을 낸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승원 판사는 근로복지공단의 주장대로 “방사선 노출과 만성 골수성 백혈병의 인과확률이 50%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인과확률이 낮다는 것이 곧 방사선 피폭에 의한 발병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과확률’은 어떤 사람이 방사선에 노출된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이미 암에 걸렸다면 그 암이 방사선 노출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확률로 측정한 것이다. 이 판사는 “방사선 피폭 등 위험인자가 질병의 발생을 더 앞당기는 경우도 있는데 인과확률은 이를 반영하지 못한다”면서 인과확률만으로 업무상재해가 아니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는 “A씨는 촬영한 필름을 현상하는 업무도 했는데 현상액에는 벤젠 성분이 들어가 있고, 벤젠에 노출되면 만성 골수성 백혈병 위험도가 증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A씨는 과거 흡연을 하였지만 발병 10년 전부터 끊었고 가족 중에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는 점 등을 종합해 “방사선 피폭이나 벤젠 노출 외에 달리 발병원인이 될 만한 요인이 없었다”고 봤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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