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진다는 교훈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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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3대 국회의원 선거기간 중 보도된 무수한 사진 중에는 폭력과 관계된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진은 전남 영암에서 주민과 평민당원들이 민정당선거운동원들을 줄줄이 묶어 놓은 모습이었다.
그 사진은 물론 폭행 광경은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이 다른 폭행사진 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줄줄이 묶인 모습이 우리가 잊고싶은 과거의 여러 불행했던 체험들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유신」 개헌을 전후해서 빈번히 선포된 긴급조치아래서 우리는 대학캠퍼스 안에서 그런 비슷한 모습으로 묶여가던 학생들 모습을 얼마나 죄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던가. 또 광주사태 때의 기억 속에도 그런 광경은 수없이 들어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혐오해 마지않던 그런 모습이 폭력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보통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을 보게된 것이 충격을 준 것이다.
그와 같은 행동은 물론 민정당운동원들에 의한 첫 도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잘잘못을 여기서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려는 것은 하나의 심각한 의문이다. 그것은 영암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유신이래 여러 차례 당해온 권위주의로부터의 폭력성에 둔감해지고 더러는 그 폭력성에 물든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다.
유신이래 처음으로 제3의 힘에 의한 폭력의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이번 선거는 치러졌다. 그런데 폭력은 바로 지금까지 폭력을 혐오할 입장에 있는 일반 시민에게서 대부분 나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세장에서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지지자들 사이에 늘어서서 폭력의 완충역할을 하고있는 전경들의 모습도 이번 선거의 새로운 풍속도였다.
위협스런 자세로 시위 학생들과 대치해서 최루탄을 쏘고 경찰봉을 마구 휘둘러대던 과거 독재권력시대의 상징이 유권자들 간의 폭력을 자제시키는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은 아이로니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대상을 닮는다는, 증오심을 만류하는 속설을 상기하게 된다. 그 속설대로 권위주의의 폭력성을 미워하다가 우리 스스로 그 폭력성에 둔감해지거나 심지어 그런 행동 양식을 닮게 되었다면 그 이상의 비극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징후는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된다.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중앙당에 선거자금을 요구할 때 「실탄」을 달라는 은어를 쓰고 있다. 선거자금을 실탄이라고 말할 때 그걸 쏠 대상이 유권자라는 말뜻의 연결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어처구니 없는 폭력성에 그들은 둔감해 있는 것이다.
군정종식을 그처럼 외쳐댔으면서 「육탄저지」니「××작전」이니 「D-데이」니 「공략」 이니 하는, 적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용어들을 선거운동의 일상적 용어로 무감각하게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노사분쟁과 학원내 분규를 둘러싸고 대화 아닌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도 두드러지고 있다. 각목이 예사로 휘둘러지고 감금과 심지어 인질극까지 범법자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분쟁해결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와 같은 행태는 1차적으로 공권력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오랜 시간을 두고 쌓인 결과다. 상대방의 불법선거운동을 목격했을 때 그들을 경찰에 고발하는 대신 자기들 사무실로 납치해 가는 것은 경찰에 고발해봐야 공정한 처벌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불신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행위의 탈법성과 그런 무법적 행태의 필연적 귀결이 사회 전체에 미칠 해독에 모두들 둔감해진 결과다.
이런 성향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할 점은 폭력이야말로 지금 이 정도로라도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의 방향을 역전시키려는 세력의 전문분야라는 점이다. 우리주변의 폭력성을 끝내야할 절대적 필요는 여기에 있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해방시킨 「간디」 의 논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영국과의 독립투쟁에 있어서 영국이 갖고 있고 인도국민이 갖고 있지 못한 무기는 기관총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관총을 무기로한 투쟁장에서 인도인들이 싸움을 하면 백전백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면 인도인이 갖고 있고 영국인이 갖고 있지 못한 무기를 찾아야 인도의 독립운동은 승리할 수 있다. 그런 전략적 계산으로 생각해낸 것이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기대도 컸고 실망도 컸던 국회의원 선거는 일단 막을 내렸다. 그 결과로 새로운 정치판도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든 간에 6·29선언을 시발점으로 한 우리 사회의 정상화와 민주화 변혁의 실질적 과업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동안 거의 정치의 부재상태에서 사회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억제되었던 갈등과 불만은 이제 정상적 경로로 해소될 수 있는 외형적 틀이 마련되었다.
그 외형적 틀이 정상적 정치기능을 발휘하게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오래 축적되어온 권위주의시대의 청산작업이 폭력 아닌 대화와 타협의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트일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는 폭력을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삼으면 백전백패한다는 「간디」의 교훈을 보여주길 기대한다.<장두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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