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참담한 현실-어느 대학장의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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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 천 명」을 넘어 「이순」이 내일 모레인 58세의 한 대학 장이 자기연구실에서 자살했다.
사람이 자살하는데 나이와 학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오늘의 모진 시대적, 사회적 상황만은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 학장은 학내문제로 자기대학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 농성하고있는 것을 몹시 비관했던 것 같다.
유서에서 자기 역량이 부족해서 사태를 사전에 해결하지 못한 것을 크게 자책했으며 제자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학생들이 슬기롭게 대처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하는 한을 남겼다.
자살을 앞에 둔 사람의 호소로서는 너무나 온건하고 평상적인 표현이다.
그만한 일에 자살을 할 것까지야 없지 않으냐고 그의 심 약을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은 그의 진심을 표현한 선택이며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결단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농성학생들은 스승의 자살소식에 오히려 의아하게 느끼고 충격도 받았으리라 믿어진다.
과격한 표현과 파괴적인 행동만이 강한 주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요란한 구호와 방화, 폭력이 횡행하는 우리사회의 비뚤어진 관행이 그렇게 믿게 했을 뿐이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사회에선 돌팔매와 각목 휘두르기는 다반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무의미한 폭력일 뿐이다.
이학장의 자살은 바로 그런 참담한 현실의 비극을 되돌아보게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조용히 설득하면 제자들의 마음을 열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스승의 순수성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이 사회가 결코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함께 이학장의 자살은 오늘 우리대학의 교권현실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대학의 주인인 교수들의 권위가 정치혼란기에 크게 손상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행정부의 부당한 간섭은 두말할 것 없고 재단이나 학부모 등으로부터의 교권침해가 그간 우리 대학의 위기를 초래했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학생들의 교수에 대한 불신과 이반은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다.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반 독재투쟁을 통해서 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공헌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사제 관계를 깨뜨리는 불행한 사태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학생들이 시위과정에서 집단의 위세를 앞세워 대학건물을 점거한다거나 총장 등 보직교수의 사퇴를 강요하는 경우는 예사가 되었다. 근래엔 「어용」이라거나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를 내모는 행태도 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그 같은 학생들의 행위는 명백히 교권침해다. 학생들이 「어용」을 비난하고 「무실력」을 평가하는 것의 타당여부는 별개로 하고 그 사실 자체는 엄연히 교권침해다.
교권은 대학 자유의 기본인 만큼 교수들 자신은 물론 학생들이 함께 보호하고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라의 민주화와 대학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 싸웠던 학생들이 교권수호를 위해서도 교수들과 동열에 서기를 기대한다.
학생들은 그야말로 슬기롭게 행동해야 한다. 교수가 자살까지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모는 학생들의 행태는 깊은 반성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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