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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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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브뤼셀=이장규 특파원】「통상 압력」하면 으레 미국과의 실랑이로만 여겨왔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 못지 않게 유럽 국가들의 통상 압력 또한 거칠게 다가서고 있다. EC(유럽공동체)는 이미 금년 초에 GSP공여 중지를 보복 수단으로 발동했는가하면 주요 한국 상품에 대해 잇따라 반덤핑 제소 공세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EC라는 데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들의 대한 관이 어떻게 고착되어가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는 너무 소홀히 해왔다. 현지에서 보고들은 유럽과의 통상 마찰 문제를 상·하로 분석해본다. <편집자 주>
『한국의 소나기 수출은 마치 유럽 산업을 레이저 광선으로 녹여 버리려는 식이다. 세계 12위의 무역국이라면서 자기네 시장은 꽁꽁 닫아걸고서 남의 나라 시장에 들어와서는 이처럼 휘저어도 되는 건가.』
브뤼셀에 본부를 둔 EC의 극동 담당 과장「보렐」씨는 말문을 열자마자 이렇게 한국에 대한 불만을 터뜨려 댔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과의 차별대우로 유럽 기업들은 앉아서 손해를 보고있고 조선·철강 회사들은 한국 기업들 때문에 문을 닫아야할 형편이다.』
그는 한국 기자를 만날 것에 대비했다는 듯이 줄줄이 엮어나갔다. 옆에 앉아있던 한국 담당 실무 책임자「프레지스코스」씨도 틈틈이 거들었다.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불만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수입 개방만 해도 말뿐이지 교묘하게 뒷문을 닫아걸고 막지 않는가.』
최근 서독 에버트 재단 주관으로 열린 세미나에서 만났던 EC관계자들의 대한 반응의 단면들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공격적인 반응들이다.
심지어 어떤 EC관리는 열이 오르자 『한국이 이런 식의 통상 정책을 계속하는 한대 유럽 수출을 완전히 봉쇄할지도 모른다』며 을러대기까지 했다. 협박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해석하란다.
나흘간의 세미나는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그들의 반응은 다분히 충격적이었다. 협박조의 발언에 검을 먹어서가 아니라 서로가 이야기하는 입장이나 시각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EC가 한국에 대해 물질특허 소급 적용 수락을 강요하면서 그 보복책으로 개도국 지원 제도인 GSP를 끊어버린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고 물고 늘어지기도 해봤지만 저쪽의 반응은『회원국들의 만장일치 의결 사항』이라고 일축해버린다. 자기네들은 EC회원국 중에서 스페인을 비롯해 4개국이나 물질 특허 자체를 보호하지 않으면서도 한국한테는 국제 관례에도 어긋나는 소급 적용을 강요하느냐고 따졌더니『스페인은 어떤 물질 특허도 보호하지 않으므로 한국보다 공평한 정책을 쓰는 나라』라는 식의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다.
EC본부 프레스센터에서는 매일 낮 12시 정각부터 예외 없이 기자 회견이 열렸다. 2백∼3백 명의 각국 기자들이 몰려들어 자국의 이익과 관련되는 사항들을 EC대변인에게 다투어 물어댔다. 일본 기자들은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한국 사람은 기자 건 상사 직원이건 단 l명도 발견할 수 없었다.
『EC에서 발간되는 관보를 비롯해 하루에도 수많은 자료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들만 제대로 챙겨 읽어도 어떤 품목이 언제쯤 덤핑제소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든지, 따라서 어떻게 예방책을 강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상당한 도움이 될텐데 참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현지 노장우 상무관의 이야기다. 대 유럽 수출이 급속히 늘어나는 가운데 EC가 어떻게 반발하고 나설지는 뻔한 사실인데도 정부나 기업 차원에서의 관심은 대미 통상 마찰에만 쓸려 있으니 야단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EC가 한국을 보는 눈은 에누리없는「제2의 일본」이다. 일본엔 당했지만 한국에 또 당해서는 안 되겠다는 경계 의식이 팽배해 있다. 통계 숫자를 보면 한국의 EC시장 점유율은 0·54%(87년 기준)에 불과한 교역 상대국 순위로 따져도 25번째로 처져있다.
그런데도 EC의 주장은 그게 아니다. 한국의 대EC 수출 증가율이 86년에 68%, 87년에 53%에 달했는가 하면 무역수지 흑자액은 86년의 11억 달러에서 87년 들어 20억 달러로 급증하는 통계들을 들이대며 나선다.
이같은 과민 반응들이 최근의 잇따른 반 덤핑제소로 방영되고 있다. 현재 덤핑 여부로 조사중인 품목만 해도 전기 오븐·VTR·비디오테이프·컬러TV 등 9개 품목에 달한다 결국 수입 규제를 당하면 수출하는 품목 비중은 전체 EC수출 중에 37·4%(87년)를 기록, 2년 전의 29·5%에 비해 크게 늘어난 셈이다 앞으로도 더 심해질게 뻔하다. 유럽 경제의 전체 흐름이 획기적으로 활기를 되찾기 어려운 한 그들의 보호무역주의는 계속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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