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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최대통령 기피가 주도세력 도운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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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보위 설치에 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가벼운 마음으로 청와대본관의 대통령집무실을 나왔다. 전 사령관은 면담 결과를 다소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권정달 대령과 이학봉 중령에게『잘됐다』고 알려주곤『일을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반면 전 사령관을 보내고 난 최대통령은 한동안 망연히 창 밖의 녹지원만 바라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내키지 않은 결정을 한 때문인지 그날 최대통령의 표정은 시종 어두웠던 것으로 측근들은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한 측근은 몹시 불안한 기색까지 보였다고 술회했다.
최대통령이 좌불안석이었던 것이 단순히 국보위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추리가 그후 나돌았다. 즉 최대통령이 당일 광주사태와 관련한 군의 작전에 관해 전 사령관으로부터 모종의 보고를 받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음날(5월 27일) 새벽에 바로 박준병 사단장이 지휘하는 계엄군의 광주진압작전이 감행됐기 때문이다. 계엄군은 27일 새벽3시30분 군병력을 광주시에 기습 투입해 1시간40분만에 전남도청을 탈환하고 광주시를 장악했다. 도청탈환과정에서 총기로 저항하던 17명의 민간인과 2명의 군인이 사망했지만 이때부터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훗날 광주사태의 책임문제와 관련, 그날 최대통령과 전 사령관의 만남이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되었다.

<광주진압책임 여운>
전 사령관은 후일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사석에서『법적으로 말하면 군 투입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며 대통령의 명령은 계엄사령관-지역계엄사령관의 계선을 통해 집행됐다』고 말해 보안사령관인 자신은 계선 밖에 있었던 점을 강조한바 있다.
또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 전 국방장관도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같은 말을 하며 당시 군의작전수행은 정당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대통령의 측근들은 최대통령이 국군통수권을 행사했다기보다 12·12세력들로부터 군 작전에 관해 제한적인 보고를 받지 않았느냐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최대통령 책임론은 일소에 부치는 경향이다.
측근 C씨는『최대통령은 광주사태의 발생과 진압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기보다 고민만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대통령은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사실상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즉 모든 진압작전과 정책결정은 군에서 하고 최대통령은 보고나 받는 처지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다만 최대통령이 광주엘 직접 가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 투입의 불가피성은 인정했을 것이라는 것이 측근들의 일치된 견해다.
아무튼 최대통령의 국보위설치결재를 받아온 전 사령관은 보안사 참모회의를 즉각 소집, 국보위설치안의 국무회의 통과 절차와 위원 인선작업을 서둘렀다.
당시 보안사는 명실상부한 정권창출의 산실이었다. 계엄하의 정보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어 중앙정보부·경찰정보가 모두 이곳에 집중되었으며 모든 행정·사법업무의 지휘부 역할을 담당했다.
참모회의의 고정멤버는 허화평 비서실장(육사17기) 정도영 보안처장(14기) 권정달 정보처장(15기) 허삼수 인사처장(17기) 이학봉 대공처장(18기) 등이었다.
이중 허화평 비서실장은 각종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고, 정도영 보안처장은 군 내부 일에만 전념했으며, 허삼수 인사처장은 중앙정보부를 수술하는 작업을 맡고있었다. 때문에 국보위 설치의 실무준비는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대공처장이 주로 맡아 했다.
최대통령의 결재는 이날 났지만 보안사는 5·17이전부터 국보위설치에 관한 구체적인 작업을 해왔다. 실은 5·17과 동시에 국보위를 설치, 발족시키려던 것이 군부의 원래 계획이었다.
설치가 늦어진 것은 순전히 최대통령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국보위 설치를 놓고 5월 17일과 27일 사이 열흘 동안 최대통령과 군부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 속에 줄다리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5월 17일 오후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건의한 청와대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군부가 최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대통령의 비상대권 발동에 의한 국보위 설치였다.
그날 지휘관회의가 끝난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김영균씨(육사11기·예비역준장·육군법무감 거쳐 당시 변호사)를 데리고 최대통령을 별도로 만났다.
이들은『조금 전 전군지휘관회의가 건의한대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군부의주도로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긴급조치에 의한 국회해산△각급 학교의 휴교조치△5·16후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기구구성 등을 건의했었다.

<"초당 법은 도움 안돼">
이들은 이 같은 진언을 당시 상황으로 봐 최대통령이 두말 않고 받아들일 것으로 믿고 구체적인 문안까지 작성해 갖고 있었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이 요구 중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거절했다. 잇단 학원소요로 시국이 비상사태이기는 하나 헌정을 중단하는 초헌법적 조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따라서 제주도를 제외한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만 동의했다. 최대통령은 그러면서『꼭 기구가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비상대권 발동이 아닌 현행법 테두리 내에서 방안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
최대통령이 긴급조치권 발동을 거부한 것은 개혁주도세력의 그 같은 계획을 사전에 안 청와대 모 비서관의 진언에 의한 것이란 설이 있으나 본인은 이의 확인을 거부했다.
어쨌든 최대통령이 그 같은 견해를 제시하자 3명은 잠시 대통령집무실 밖에 나와 법전을 뒤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노 사령관은 최대통령의 그런 태도를 신군부에 대한 반대로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김영균씨가 국보위 설치를 위한 법률자문에 처음으로 응한 것은 5월 10일쯤이었다. 김씨는 육사11기 출신으로 군 복무 중 고시에 합격해 군 법무감을 지내고 예편했다. 당시는 변호사 겸 동방생명 감사로 일하고있었다.
하루는 보안사에서 전화가 왔다. 전두환 사령관이 보자는 것이었다. 갔더니 전 사령관은 『도와주어야겠다』고 했다.『무엇을 말이냐』고 물었더니『권정달 처장을 만나보면 안다』 고 했다. 그러면서『일이 잘못되면 큰일이니 회사를 그만 두라』고 해 뭔가 생사를 건 중대한 일을 도모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김씨가『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회사 일이 그렇게 바쁘지는 않으니 회사에 적을 두고 도와줄 수도 있다』고 하자 전 사령관은『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김씨가『1백만 원 정도 된다』고 하자 전 사령관은 웃으면서『그만 두라』고 했다. 김씨는 회사에 사표를 쓰고 권정달 처장과 합류했다.
권 처장은『5·16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비상기구로「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를 만들고자한다』며 이 기구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설치령을 함께 만들자고 했다.
작업은 안가에서 했다. 주로 권정달·허화평·허삼수·이학봉씨와 상의해서 했는데 노태우·정호용·박준병 장군이 가끔씩 작업장에 들렀다고 한다. 이들 장군들은 실무작업에는 개입하지 않았으며 막후에서 전 사령관에게 자문·조정역할을 하는 것 갈았다. 전 사령관에 대한 작업진도의 보고는 권정달 정보처장이 도맡아 했다. 보안사 참모 중 정도영 보안처장만 자신의 고유영역인 군사보안업무에 매달렸다. 12·12이후라 군사적 업무가 중시돼 보안처장은 그 일에만 전념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5·17전군지휘관회의에 앞서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국보위안은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슷한 법적 근거와 모양을 갖췄었다. 5·16때의 혁명공약과 흡사한 비상선언문도 작성했다.
그러나 이 같은 준비는 최대통령의 거부로 다시 전면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군부는 최대통령의 거부를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구상을 방해하는 것으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대통령의 문제 제기 정도로 받아들이고 최대통령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최대통령에겐 힘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갈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핵심 중의 한 사람은『결과적으로 최대통령의 지적은 우리를 엄청나게 도와준 셈이 되었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실토했다. 다 만들어 놓은 안을 다시 짜면서 짜증도 내고 욕도 했지만 최대통령은 당시 주도세력에서 간과하고 있던 중요한 문제들을 계몽해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보다 대통령령에 의한 대통령자문기구가 훨씬 더 합법성과 대외 이미지 면에서 온건하고 유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묘안 얻어 내심 쾌재>
또 국보위를 대통령자문기구로 하면 자연스럽게 민간인을 참여시킬 수 있어 쿠데타에 의한 군사평의회란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부수 효과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보안사 팀은 뜻하지 않은 묘안을 얻어 나중에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통치기반 마련을 위한 신군부의「정치실험」은 교묘한 민군 협력체제를 찾아낸 것이다. 반면 미력하나마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순리를 좇으려던 최대통령의「저항」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군부세력의 방파제 또는 얼굴 역으로 이용당하는 길을 트고 말았다.
형식상 국보위는 의장인 대통령의 자문기구지만 실제는 대통령이 국보위의 조정·견제를 받는 특이한 체제를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어쨌든 군부는 최대통령의「지시」를 받들어(?) 즉각 새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법적 근거를 정부조직법과 계엄법에서 찾아내고 설치령을 준비했다. 법적 근거를 대통령으로 한다면 최대통령이 또다시 거부할 리 만무하다고 보고 한발 앞서 국보위의 기구표와 운영규정까지 만들어 놓고 최대통령에게 결재 받을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권정달 정보처장이 정관용 당시 중앙공무원연수원부원장(전 내무장관)을 국보위 사무처장에 차출한 것은 국보위 발족 전인 5월 20일쯤이었다.
권 처장은 생면부지의 정부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권 처장은 자리의 성격상 사무처장에는 총무처 간부를 데려다 앉히는 것이 좋다는 내부결정에 따라 수소문 끝에 정부원장을 적임자로 찍어놓았던 것이다.
권 처장은『계엄사와 내각사이에 조정역할을 하는「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겠으니 사무처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정 부원장은 즉석에서 수락했다. 아울러 철저한 보안을 당부했다.
이 때문에 정부원장은 한동안 직장을 무단 이탈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김용래 중앙공무원연수원장(현 서울시장)이 업무상 정부원장을 찾다가 없자 혹시 무슨 불의의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닌가해서 직원들을 시켜 수배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권 처장은 우선 사무실을 청와대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 물색하라고 주문했다. 처음엔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삼청동의 교육공무원연수원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마친 연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우선 회의실과 부속실만 간신히 마련해 작업에 착수했다. 설치령을 만드는 일등 중요한 업무는 대부분 보안사에서 이루어졌다. 설치령을 급히 새로 만든 나머지 모든 문서가 인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볼펜으로 쓰고 그 위에 줄을 그어 고치고 한 것들이었다.
사무처는 급조된 기구라 예산이별로 없었다. 총무처 등에서 차출해온 직원들은 월급을 모두 원래 소속기관에서 받았으며 고용원 몇 명만 독자예산으로 월급을 주었다.
사무처가 제대로 모양을 갖춘 것은 5월 27일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난 뒤였다. 연수를 받던 교육공무원들을 서울시청 연수원으로 옮기고 각종사무실과 회의실을 그때 만들었다.
그러나 보안사에서 마른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 상정을 위해 총무처에 오자 총무처 공무원들 사이에 약간의 반발이 있었다. 법적으로 대통령자문기구인데도 자문기구가 할 수 없는 기능이 규정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총무처 영문몰라 반발>
예컨대 설치령 제1조는『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보위를 위한 국책사항을「심의」하는 기구』라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국책을 심의한다면 사실상 내각의 업무를 대행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 안이 나온 경위를 잘 모르는 총무처는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청와대에 시정해줄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에선『우리도 모른다』는 식의 답변을 해왔다.
5·17과 광주사태 발발 후 청와대의 사기는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총무처 담당인 고건 정무수석은 광주사태직후『몸이 아파 입원한다』며 사표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최광수 비서실장·정동렬 의전·서기원 공보·이원홍 민원수석과 김경원 외교 김영준 사정특보가 있었으나 군부로부터 도도히 밀려오는 외압을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 그때 최 비서실장의 운전사가 파렴치한 사건으로 구속됐다. 청와대 내에서는 이 사건이 이따금 군에 빡빡하게 대했던 최 실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마디로 대세가 기울고 있음이 도처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보위 설치안은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제안설명을 하고 아무런 이견이나 토론 없이 통과됐다.
설치안이 통과된 직후 전 사령관은 이른바 12·12사건 때의 경복궁 멤버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보안사 참모회의가 정책의 집행기구라면 경복궁 멤버회의는 일종의 비공식 의결기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두개의 조직이 바로 신군부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날 회의의 의제는 국보위 인선에 관한 문제였다. 난상 토론 끝에 회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대통령임명 케이스의 국보위원은 군의 현직을 존중해 임명하고, 상임위 분과위원장은 군 출신과 직업관료를 균배하고, 상임위 분파위원은 각계에서 영입하되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고른다는 것 등이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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