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프롤로그…세계 속의 한국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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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달리는 고속열차 안에서 차창을 통해 휙휙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보는 느낌입니다.』한국을 자주 찾는 어느 외국기업인의 이야기다. 하도 빨리 달리는 바람에 가로수의 정확한 형체를 식별할 겨를이 없는 것처럼 한국 재계의 변화가 그처럼 무상하다는 비유다. 지난83년 본지가 1백12회에 걸쳐 연재한「재계 새지도」도 어느덧 낡은 지도가 되고 말았다. 불과 5년 사이에 한국재계는 질·양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계속해온 것이다. 그 속편으로 「뻗어나는 재계지도」라는 이름아래 우리 나라 경제와 재계의 좌표, 그리고 내일의 진로를 다면적으로 심층 조명해본다(「뻗어나는 재계지도」시리즈는 지면이 허락되는 대로 1주 2∼4회 게재합니다).<편집자주>
8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재계의 재편바람은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왔다. 4년여의 혹독한 불황이 흥망성쇠를 분명히 갈라놓았고 최근의 호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변전의 모습들을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했다.
변화는 갈수록 속도와 폭을 더해간다. 10년 단위의 획정으로는 도저히 재단이 불가능할 만큼 복잡다단해져 간다. 해외건설업의 재계안방차지는 이미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80년대 초에만 해도 50대기업의 서열에 20개 안팎에 달했던 해외건설회사 수가 작년에는 6개로 줄어들었을 정도다.
가전제품회사들이 재계의 새 판도를 그려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날 감자기 반도체·컴퓨터전쟁이 돌풍을 일으켰고 이젠 자동차회사들이 안방차지를 넘보게 됐다.
수많은 부심이 거듭되어 왔다. 설마 하던 재계7위의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도산한 것을 비롯해 해외건설·해운회사 등이 급기야는 무더기로 곪아터지면서 한구석으로 격리시켜졌는가하면 전자·기계 쪽의 떠오르는 별들이 빠른 속도로 재계의 신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선두그룹의 판도는 삼성·현대·럭키금성·대우·선경 등 5개 재벌들로 고착되어 가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한 발짝 뒤의 쌍룡·한국화약·효성·동부·한 일 사이에는 어제· 오늘이 다른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다.
바로 그 뒤에는 소위「중견기업」이라는 알짜배기들이 독자적인 전문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다.
중소기업들도 종전의 더부살이 신세가 아니다. 기업 수(광공업)만 해도 80년의 3만여 개에서 최근에는 5만개 선을 훨씬 넘어섰을 만큼 괄목할 세 확장을 계속중이다.
뭐니뭐니해도 80년대 재계판도를 특징 것은 첫 번째 요인은「3저 시대」의 도래에서 찾아진다. 나라경제를 뿌리째 흔들던 각종 부실 더미들조차 3저가 몰고 온 호황 속에 간단히 묻혀버렸다.
기름을 끼얹은 듯이 수출이 폭발하면서 만성적자경제가 단숨에 흑자로 돌아섰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않던 불황이 1∼2년 사이에 사상 최대의 호황으로 반전된 것이다.
이 같은「3저」는 한국재계를 본질적으로 한 차원 끌어올렸다. 이른바「국제화」-. 세계경제 속의 한국재계의 위상을 확실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세계 4위의 외채국가라는 오명이 국제수지 흑자규모에서 세계 4위라는 명예로 바뀌었다. 무역량으로 따져서도 세계12위. 이제 어느 모로 봐도 한국의 재계는 세계경제의 중심지대에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는 셈이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금년말로 수출 6백억 달러를 돌파하고 90년대 초반에 1천억 달러를 기록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내수·수출이 따로 없다. 소위 개방시대로의 진입이다.
재계의 경쟁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포철은 신 일본제철의 벽을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삼성반도체는 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그물을 뚫고 나가야할 숙명적인 길에 들어섰다.
국내업체들끼리의 경쟁은 이제 큰 관심사가 될 수 없다. 누가이기든 한국기업이니 나라경제 전체로 봐서는 그게 그거다. 그러나 국제화시대의 경쟁은 그게 아니다. 이기면 다행이로되 지면 결단이 난다.
결국 한국재계가 그만큼 통도 커지고 큰물에서 놀게된 것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은 당연히 변화를 전제로 한다. 우선 80년대 들어 사람도 많이 바뀌었다. 창업 1세대들의 뒤를 이은 젊은 2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가하면 전문경영인 출신이 상공장관으로 발탁되는 세상으로 변했다.
기술개발에 소홀하다는 것도 옛말이다. 지난80년에는 8백74억원에 불과했던 민간기업의 기술개발투자액이 작년 한해에만 1조6천억원을 기록했다. 7년 사이에 약 20배로 눌어난 셈이다. 더구나 웬만한 기업 치고 연구소 없는 데가 없다. 기업연구소만 해도 4백74개, 향후 2년 사이에 당장 2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기술개발 없이는 경쟁에서 이겨날 수 없다는 상식이 이제 우리 재계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변신을 위한 몸부림 또한 곳곳에서 치열하다. 항공기·통신기기·유전공학 등 미래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분야별로 혈전이 벌어지고 있고 사라져 가는 해외건설업체들은 호텔·레저산업 쪽에서 재기의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재벌마다 유통업 진출이 유행처럼 번지고 섬유회사들은 신소재개발은 물론 탈 섬유를 외치면서 인기품목인 자동차·전자부품 쪽으로 변신을 서두르고있다.
흑자시대·개방시대로의 진입은 기업변신의 폭과 다양성을 훨씬 크게 한다.
기술도입 건수만 해도 5년 전에 비해 2배 수준으로 불어났고 각종 제한 조치가 풀어지면서 외국기업의 대한진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우리 기업이 공산국가에까지 들어가 현지공장을 설립하는가 하면 외국기업들의 대한 진출 역시 우리 재계의 한구석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 IBM코리아 같은 기업은 이익으로 따져 10위안에 랭크되고 있다.
경제대국의 꿈을 실현할 90년대를 목전에 둔 길목에 선 한국재계는 이처럼 싫든 좋든 세계경제 속으로 뿌리를 뻗어 내릴 수밖에 없다. 달리 다른 선택은 없다. 조만간 1천억 달러의 수출을 한다면서 내 시장·네 시장을 가려놓을 처지가 못된다. 한국재계는 이미 그야말로 국경 없는 전쟁터로 나선 것이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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