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미 달래기'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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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오른쪽)이 바첼레트의 취임식에 참석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무장관에게 전통악기인 '차랑고'를 선물했다. [발파라이소 AFP=연합뉴스]

미첼 바첼레트(54)가 12일(현지시간)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미국은 그의 취임식 자리를 '융통성 있는 남미외교'를 펴는 기회로 십분 활용했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11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바첼레트 취임식장의 축하 사절로 보냈다. 더불어 중남미에 군사 원조를 재개할 뜻도 내비쳤다. 중남미에 불고 있는 반미 바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제스처였다. 미국은 올 초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취임식엔 토머스 섀넌 국무부 남미담당 차관보를 보냈다. 그러나 이번엔 몇 단계 격을 높였다. 남미외교를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유엔 주도로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반대해 왔다. 미 국민을 외국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미국은 ICC에 찬성하는 국가들엔 군사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볼리비아.브라질 등 중남미 12개국이 미국의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실제로 군사 원조가 끊겼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스 장관은 칠레를 방문해 중남미 국가들이 ICC를 지지하더라도 원조를 재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라이스는 칠레 방문 직전 ICC와 관련, "우리가 우리의 발등에 총을 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ICC 찬성 국가를 제재하다 너무 많은 적을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자성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라이스 장관의 이 발언을 "미국이 중남미와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라이스는 이날 취임식에 참석한 남미의 여러 정상과 두루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강성 좌파로 올 1월 취임한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과도 처음 대면했다. 약 30분간 만남에서 라이스는 모랄레스에게 코카인의 원료인 코카 재배 중단과 마약 밀거래 방지를 촉구했다. 볼리비아는 세계 3위의 코카 생산국이다. 이에 대해 모랄레스는 합법적인 코카 재배를 옹호하는 한편 불법적인 마약 밀거래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전했다. 회동을 마친 모랄레스는 라이스에게 코카 잎 무늬가 새겨진 기타 모양의 전통 악기를 선물했다. 그러자 평소 피아노를 즐겨 연주하는 라이스는 "나는 원래 음악가"라며 웃으며 받았다.

그러나 라이스는 중남미 반미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는 별도로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취임식장에서 거의 상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앉았고, 취임식이 끝나자 각자 출구를 통해 행사장을 떠났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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