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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 소리 듣지 않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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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 차장

최민우 정치부 차장

10일 오후 포털 검색어 상위권엔 ‘박정엽’이란 이름이 올랐다. 그는 이날 문재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한 기자다.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전하실 말씀 있는지 궁금하다, 그래야 편하게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말이 질문이지 내심 ‘대통령님, 좀 말려주세요’라는 간청처럼 들렸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매정하리만큼 명확히 답했다.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시라, 담담하게 생각하고 예민할 필요 없지 않은가.”

과거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엔 시나리오가 있었다. 누가 질문하고, 무엇을 물을지 기자단이 대충 얼개를 정하면 이에 준해 청와대도 답변을 준비했다. 아예 “이런 걸 물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면 이번엔 사전 작업을 최소화해 즉흥성을 높였다. 개방을 중시하는 시대 정신이자 국정 현안에 대한 최고 통치권자의 내공을 알고 싶어하는 국민적 요구가 반영된 탓일 게다. 하지만 민낯을 드러낸 건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 언론이었다.

블랙코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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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기자는 “어제 위안부 합의 발표가 있었는데, 만족할만한 결과가 이뤄졌는지, 사드나 원전이나 절차적 정당성을 먼저 주장하는데, 그거에 비해 대선 때 공약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는데…”라며 알 듯 말 듯 한 물음을 던졌다. “질문 하나만 선택해주면”이라는 대통령의 반응은 실상 ‘못 알아 듣겠는데’라는 속내의 완곡한 표현처럼 보였다. 또 다른 기자는 “지방소멸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라며 일장연설을 했다. “빡세다”라는 비속어를 연거푸 쓰는 이도 있었다. 서론은 길고 정작 질의는 엉뚱한 걸 묻는, 논리비약도 허다했다. 간결 명료한 외신 기자의 질의와 확연히 비교됐다. 인터넷엔 “너절리즘의 본색이 드러났다”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1인 미디어 세상이다. SNS엔 전문가가 넘쳐난다. 그나마 기자의 경쟁력이라면 취재현장이 있다는 점과 질문할 수 있는 권리다. 아인슈타인은 “1시간 중 55분을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사용하겠다. 정답을 찾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실상 특종은 취재원의 좋은 대답이 아니라 기자의 좋은 질문에서 나온다. 송곳으로 찌르진 못할지언정 독해 불가의 질문이라면 ‘기레기’ 소리를 들어도 싸다. 욕먹는 걸 무서워할 때가 아니다. 언론의 생존이 걸려 있기에 하는 반성이자 쓴소리다.

최민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