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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현대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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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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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안 계세요? 경비실이 택배를 안 받는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난해 11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민들은 이런 택배기사의 전화를 받았다. 경비원 노조가 택배 보관과 주차관리 업무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조가 갑작스레 업무 중단을 통보한 배경엔 개정된 공동주택관리법이 있다. 지난해 9월 법 시행으로 경비원 본연의 업무를 넘어선 ‘부당한’ 지시를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동안 경비원에게 맡기던 택배 보관과 분리수거 등이 사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불법이 돼버렸다. 현대아파트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공동주택이 다 해당한다. 법을 지키자면 경비원 외에 이런 업무를 도맡아 할 관리원을 별도로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급격한 관리비 인상 등 현실적 요인으로 추가 고용이 쉽지 않은 만큼 많은 아파트가 경비원을 용역으로 전환해 경비인력은 줄이고 관리원을 쓰는 선택을 한다.

새해 들어 경비원 해고 소식이 잇따르는 이유다. “한 달에 몇천원 더 내기 싫어서 경비원을 잘랐다”며 현대아파트 주민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용역전환의 직접적 요인은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바로 이 공동주택관리법에 있는 셈이다.

특히 주차난이 심각한 현대아파트는 경비원이 차량 키를 맡아 관리하면서 주민이 차를 뺄 때마다 이중 주차된 차를 빼주는 역할을 해왔다. 꼭 필요한 일이라 지금까지는 주민들이 반상회비를 모아 매달 정기적으로 주거나 세대별로도 따로 사례하는 식의 암묵적 합의로 주민과 경비원이 큰 문제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정부가 느닷없이 경비원 인권 보호를 내세워 법을 들이대면서 상황이 꼬여버렸다.

정부의 규제 방침이 알려지자 지난해 4월 경비원 노조는 그동안 주차 업무로 제대로 쉬지 못했다며 수억원에 달하는 수당을 달라는 진정서를 고용노동부에 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입주자대표회의의 용역전환 결정이 나오자 주차 관리와 택배 보관 업무 중단이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입주자대표회의는 2월부터 용역전환 후 일부 경비원을 관리원으로 돌려 기존 업무를 계속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결국 경비원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신분만 불안정해질 공산이 커졌다.

“법 취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인데 경비원들이 얻는 실익은 없다”는 현대아파트의 한 동대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정부가 섣불리 나섰다가 거꾸로 고용 불안으로 내몬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