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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금으로 부실기업 살리는 악순환 끊어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5호 02면

사설

새해 문재인 대통령의 첫 외부 일정은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해양 방문이었다. 지난 3일 옥포조선소를 찾은 대통령은 북극 항로를 오갈 쇄빙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야말 5호’에 올라 “전문가들은 조선경기가 2~3년 후부터 서서히 회복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한국 조선산업이 이 힘든 시기만 잘 이겨 낸다면 다시 조선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선산업 경쟁력 강화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재계 신년인사회 대신 조선업체 현장을 방문한 건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시장은 대통령의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통령 방문 당일 대우조선 주가는 12.5% 올랐다. 하지만 대통령이 신년 벽두부터 특정 산업에 대한 지원을 공개 언급한 게 적절한지를 놓고는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외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대하는 건 악전고투 끝에 되살아난 SK하이닉스 사례일 것이다. 1983년 현대전자로 출발한 하이닉스는 99년 김대중 정부의 빅딜로 LG반도체와 합병해 탄생했다. 합병 당시 부채가 17조원에 달했던 하이닉스는 2001년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뒤 눈물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직원들은 임금 동결과 감원을 받아들이며 구조조정에 동참했다. 설비투자 자금이 없어 200㎜ 웨이퍼 공장을 300㎜ 공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우여곡절 끝에 20여 개에 달했던 세계 D램 업체가 3~4개로 재편된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하이닉스는 지난해 15조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시장 논리에 따라 하이닉스를 매각하거나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해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조선산업이 반도체와 같은 결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기 불황이 언제 끝날지도 불투명하다. 대통령이 인용한 2~3년 후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은 조선업계 내에선 몇 년째 되풀이되고 있는, 희망사항이다. 수주량 기준으로 한국은 2012년부터 중국에 추월당했다. 고부가가치 선박을 중심으로 기술력은 중국보다 4~5년 앞선 것으로 평가받지만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2만2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중국 조선소에 뺏겼다. 해양 원유생산설비인 FPSO도 저렴한 동남아 인력을 앞세운 싱가포르 업체가 가져갔다.

기약 없는 희망사항에 기대기에는 대통령 발언이 불러올 파장은 너무 크다. 조선업계는 이미 설비 규모 축소와 인력 감축 등 자체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매출 목표를 지난해보다 2조원이나 낮췄고 삼성중공업은 임원의 30%, 전체 팀의 25%를 줄이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 계획을 세웠다. 반면 지역경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구조조정에 반대하고 있다. 하도급업체의 연쇄 도산 등으로 지역경제가 초토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전국금속노동조합과 조선산업노조연대 등은 지난 연말 국회를 찾아 조선소 회생대책을 요구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정권 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구조조정 반대론에 힘을 싣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금융권과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특히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 논리가 개입해 세금으로 부실기업을 지원했다간 제2, 제3의 충격파가 한국 경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 조선산업이란 환자에 대해선 그동안 실사와 토론 과정을 거쳐 이미 진단 결과가 나왔다. 투약이 아니라 도려내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게 결론이다. 하이닉스조차 2014년 흑자를 기록할 때까지 19년 동안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했다.

다만 이참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조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에 분리 대응할 필요는 있다. 조선뿐 아니라 자동차·금융·해운 등 중복 투자와 저효율 구조를 바꿔야 할 분야는 많다.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생계를 위협받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세금을 써야 한다면 부실기업 지원이 아니라 구조조정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재활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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