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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0만원 영어유치원은 안 막고"…교육부 '어린이집 영어 수업 금지' 요청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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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선행학습금지법, '영유아보육법' 어린이집까지 영향 미칠까 

티슈페이퍼를 가위로 잘라 날개에 붙이면서 다양한 모양과 색상을 영어로 익히는 수업 중인 아이들. [중앙포토]

티슈페이퍼를 가위로 잘라 날개에 붙이면서 다양한 모양과 색상을 영어로 익히는 수업 중인 아이들. [중앙포토]

교육부가 지난달 30일 “새 학기부터 선행학습금지법에 따라 유치원과 초등학교 1, 2학년 영어 방과 후 수업이 전면 금지되는 만큼 어린이집도 영어 특별활동 수업을 금지해달라”고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에 요청한 사실이 밝혀졌다.

교육부 "3월부터 어린이집 수업 금지" 요청 #복지부는 난감 "무작정 밀어붙이기 힘들다" #"월 3만원 수업까지 막나" 학부모 거센 반발 #보육계 "현장 목소리 무시"…대책 논의키로 #전문가 '취지 좋지만 일방통행 피해야' 우려 #"입시 변화 없으면 사교육 풍선 효과만 커져"

어린이집은 선행학습금지법 적용 대상이 아닌데도 영어수업을 금지하려 들자 학부모·어린이집이 반발하고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1, 2학년의 경우 지난 2014년 마련된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선행학습금지법)에 따라 3월부터 영어 방과 후 수업이 금지된다. 공교육 과정에서 영어 교육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하는 데, 그 이전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법 위반이 되는 것이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인천의 한 공립 유치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인천의 한 공립 유치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육부는 선행학습금지법의 취지에 따라 어린이집에서도 영어 교육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복지부의 속내는 복잡하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책 방향에는 공감하지만 갑작스러운 요청이라 어린이집 원장ㆍ학부모 등의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회신했다"면서도 “교육부는 신학기 일정에 맞춰 이번 달 내에 결론을 내자며 속도를 내지만 무작정 밀어붙이기는 힘들다”며 난감해했다.

유치원ㆍ초등학교는 선행학습금지법이 바로 적용되지만 영유아보육법에 따라 운영되는 어린이집의 경우 영어 특별활동 수업을 금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 영유아보육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어린이집은 음악ㆍ미술ㆍ체육 등 예체능 분야, 외국어 등 언어 분야, 수리ㆍ과학 등 창의 분야 등의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영유아보육법 시행규칙을 개정하기 전에는 어린이집에 영어 수업을 하지 말라고 강제할 권한이 없다"고 설명했다.  금지하려면 법령을 바꿔야 하는데 석 달 이상 걸린다.

천안의 한 어린이집 아동들이 영어 특성화 수업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천안의 한 어린이집 아동들이 영어 특성화 수업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소식을 접한 학부모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6살, 4살 된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직장맘 안지현(38ㆍ경남 창원시) 씨는 “월 3만원 정도 내면 주 2회 영어 동요를 부르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영어수업을 받을 수 있어 만족하고 있다”며 “학습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수업을 금지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안 씨는 “월 100만원 이상 드는 영어유치원은 막지 않으면서 어린이집 영어 수업을 금지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영어유치원은 명칭은 유치원이지만 학원이라 선행학습금지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4살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주부 김승미(33ㆍ서울 양천구) 씨는 “지금도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선배 엄마들이 ‘영어유치원 다니고 온 아이와 아닌 아이들이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이야기를 한다”며 “앞으로 영어 사교육을 시킬 수 있는 가정과 그럴 수 없는 가정 아이들 간의 격차가 더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영국 국기 그림과 영어 수업용 교재. [중앙포토]

영국 국기 그림과 영어 수업용 교재. [중앙포토]

 보육계에선 “현장의 목소리는 무시한 처사”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는 다음 주 이사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김용희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장은 “어린이집 특성화 수업은 원장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학부모가 참여하는 운영위원회가 정하는 것”이라며 “학부모 선택권을 무시하고 정부에서 방침을 정해 일방적으로 따르라고 한다면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곽문혁 한국민간어린이집연합회장은 “3월까지 두 달여 남았는데 여론 수렴 한번 없이 갑자기 통보하면 학부모들의 항의는 누가 감당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곽 회장은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하루 12시간 아이들을 보살핀다”며 “직장에 다니는 학부모님들이 어린이집에서 영어 등을 대신해주기 바라는 수요가 많아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방과후 영어교사들이 지난해 11월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초등 1,2학년 방과후 영어교실 금지에 대한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방과후 영어교사들이 지난해 11월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초등 1,2학년 방과후 영어교실 금지에 대한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영어 수업 금지, 어린이집도 영향 받나

 선행학습금지법 취지에 동의하는 전문가들 상당수도 정부의 일방적인 어린이집 영어 수업 금지 방침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김인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원론적으로 영어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하는 게 맞지만, 학부모 불안감과 어린이집ㆍ유치원 상황 등을 고려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학부모 의견 수렴과 전반적인 입시 정책 변화 없이 조기 교육만 금지하면 결국 사교육 시장으로 몰리는 풍선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스더ㆍ정종훈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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