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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가봤습니다] 큰길로 나온 성인용품숍 … 콘돔 박스 미술품처럼 진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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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지난해 12월 27일 찾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성인용품점‘ N.19’의 매장 2층 입구 모습. [신인섭 기자]

지난해 12월 27일 찾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성인용품점‘ N.19’의 매장 2층 입구 모습. [신인섭 기자]

대한민국 트렌드를 리드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두 달 전 이곳에 아무런 설명 없이 외벽에 ‘N.19’라는 표식으로 벽면을 장식한 5층 규모의 매장(404㎡·약 120평)이 등장했다. 모양새로만 봐서는 새로운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만 했다. 그러나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 들어선 이 매장이 파는 것은 ‘성인용 토이’, 즉 성인용품이다.

신사동 가로수길 ‘N.19’ #손정의 투자한 스타트업 블랭크TV #차세대 먹거리로 제품 기획·제작 #주요 고객인 30대 초반 연인 겨냥 #매장 인테리어도 산뜻하게 꾸며 #“달라진 성의식 반영한 유통 트렌드”

성인용품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자유로’나 으슥한 뒷골목이 아닌 서울 시내에서도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상권 대로변에 이런 규모의 가게가 등장한 것은 그 자체로 바로 화제가 됐다. 지난해 12월 초 감각적인 매장 인테리어 소개 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노출되자 방문객이 200% 이상 급증했다.

N.19를 기획하고 선보인 곳은 국내 미디어 커머스(V커머스라고도 불린다)의 선두주자인 ‘블랭크TV’다. 이 업체는 2016년 사업을 시작해 창업 첫해 매출 100억원을 올린 유력 미디어 스타트업이다. 지난해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그룹의 한국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벤처스가 100억원 투자를 결정하면서 주목받은 곳이기도 하다.

인테리어 소품처럼 가지런히 진열된 판매 제품들. [신인섭 기자]

인테리어 소품처럼 가지런히 진열된 판매 제품들. [신인섭 기자]

미디어 커머스는 제품을 기획하고 주문형 제작으로 만든 뒤 제품 띄우기는 전적으로 소셜미디어에 의존하는 형태의 유통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무심코 열어 본 제품 체험 동영상이 즉각적인 구매로 이어지기 때문에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진입이 쉬운 편이라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프트뱅크 투자로 날개를 단 블랭크TV는 차세대 먹거리로 성인용품을 골라, 오프라인 매장에 과감한 투자를 진행했다.

지난해 12월 27일 찾은 N.19 매장엔 손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층에서 성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검사하고 입장하면 2층은 이 편집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내하는 층으로 꾸며져 있다. 벽면엔 콘돔 박스가 설치미술품처럼 진열돼 있다.

화~일 정오부터 오후 9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주중에는 약 300명, 주말에는 1000명 넘게 방문한다. 사진 찍으러 들어왔다가 현장에서 구매하는 소비자가 많다. 매장 방문객의 90%는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의 커플들이다. 온·오프라인 실구매자의 약 60%는 여성이다. 층마다 배치된 직원은 남녀 모두 ‘스태프’라고 찍힌 흰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다. 3층은 남성을 위한 제품을 모아두었다. 낡은 헬스클럽 느낌을 주기 위해 샌드백을 걸어 놓았고 세계 각국의 남성용 ‘토이’가 가격대별로 분류돼 있다. 온라인 구매에서 알 수 없는 촉감이나 포장 형태, 사용법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특정 성을 대상화하거나 노골적인 제품,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제품은 배제했다는 설명이다.

역할극에 쓰는 각종 의상. [신인섭 기자]

역할극에 쓰는 각종 의상. [신인섭 기자]

4층은 여성을 위한 층이다. 미국 유명 그래픽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으로 장식한 여성용 기구 보관함,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립스틱을 본떠 만들어 이미 ‘명품’ 반열에 들어섰다는 여성용 토이가 화장품처럼 진열돼 있다. 그냥 봐서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산뜻한 모양새와 색감을 자랑한다. 5층은 낡은 지방 공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코스튬 플레이 의상과 거울, 포토존, 벤치 등이 마련돼 있다.

블랭크TV의 목표는 N.19를 생활용품전문점인 다이소, 무지처럼 격식 없는 성인숍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업체는 일본 생활용품 전문점인 ‘돈키호테’에 성인용품 판매대가 따로 마련돼 있는 것을 보고 ‘19세 이상만 출입할 수 있는 편의점이라는 콘셉트’로 매장을 기획했다.

지금까지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N.19 프로젝트를 이끄는 블랭크TV의 이고운 프로는 “사람들이 ‘재밌는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워서 우리도 놀랐다”고 말했다. 매장을 내기 전 ‘시험 삼아’ 준비해 지난해 9월 선보인 콘돔브랜드(커먼데이즈)는 3개월 만에 준비한 물량을 모두 팔고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이에 따라 같은 라인으로 마사지 젤 같은 제품을 추가해 N.19 대표 상품으로 키우는 중이다.

국내 성인용품 산업 규모는 약 2000억 원대로 추산된다. 이는 피임기구와 약품 같은 ‘양성화된 성인용품’만을 따진 규모다. 완구류나 각종 이벤트에 쓰이는 행사 용품을 더하면 규모는 그보다 두 배 이상으로 뛴다. 이 프로는 “이 산업 규모가 얼마나 더 커질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망이 좋다”며 “콘셉트를 달리하는 다양한 편집숍이 앞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홍대와 이태원 일대 상권에 새로 문을 연 캐주얼 성인용품 편집숍만 해도 10여곳이 넘는다. 성인숍이 대로변으로 나오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성윤리 의식을 지닌 소비자의 등장과 유통업계 전문점 개점 추세가 혼합된 것으로 본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유통학회장)는 “밀레니얼 세대를 타깃으로 한 전문점이 하나 더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들에게 이런 형태의 성인숍은 (신발전문점인) ABC나 하이마트에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또 “온라인과 오프라인 채널을 동시에 갖춰야 살아남는 시대인만큼 성인산업에서도 오프라인에서 과감한 투자를 하는 전문점이 더 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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