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서 온 편지|동구권 흔드는 "민권바람"|【홍성호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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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최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변화를 상징하는 민권운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소련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서 있었던 인종폭동도 시민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겠지만 이보다 앞서 지난달 동구 여러 나라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소련과 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의 주요 도시들에서 2월 반체제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수백명 규모의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동구권에서 각국의 민권운동조직이 연대하여 동시다발의 연합시위를 벌인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주목되는 변화다.
성명발표와 가두데모 등으로 이어진 이 움직임은 최근 루마니아당국이 바르샤바조약 반대운동을 벌인 사람들에 대한 억압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다페스트와 바르샤바 등지에서는 수백명의 군중들이 대낮에 루마니아대사관으로 몰려들었고 프라하에서는 60여명이 24시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해산된 뒤 집으로 돌아가서도 루마니아 국민들이 겪고있는 경제적 핍박을 동정하는 뜻으로 이날 하룻밤 동안 일제히 아파트의 전등을 꺼버리는 이색적인 소등 데모를 계속했다.
이러한 동구제국에서의 일련의 시민연합운동에 대해 소련의 「안드레이·사하로프」 박사, 헝가리의 「미클로스·하라스즈티」 등 민권지도자들도 지지성명을 발표, 가세했다.
항의가 가장 격렬했던 폴란드에서는 자유노조지도자들을 포함한 50명의 시위자들이 루마니아 대사관측에 탄원서까지 전달하려 했으나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 자유운동가들은 이날 발표된 성명에서 『우리는 인권의 존엄성을 지키고 굶주림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서 『우리들이 바라는 자유와 민주를 향한 꿈이 중부유럽 전체에서 꼭 달성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고 선언했다.
바르샤바에서는 10여명의 시위자들이 체포될 만큼 격렬했던 이번의 움직임은 동구권의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조직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고 있으며 이로 미루어 동구제국들간에 과거 독립적이던 시민정치집단이 서로 연계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18개월 동안, 그러니까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이 집권한 이후와 때를 같이해서 동구에서는 인권회복과 군축,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운동과 환경 보전 등을 위한 대중운동이 각국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난 종전의 양상과는 달리 서서히 상호 접촉을 통한 조직화된 형태로 변해왔으며 이것이 이번에 극적으로 표출된 셈이다.
이는 물론 헝가리와 폴란드 등 일부 동구국가들의 정치적 완화정책에 힘입은 바 크지만 역시 가장 큰 요인은 억압 대신 화해를 들고 나온 「고르바초프」의 개혁주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동구 자유시민운동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종주국의 태도를 그대로 답습하려는 일면도 없지 않으나 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나 80년의 폴란드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민권운동이라는 점에서 훨씬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나 헝가리·폴란드의 반체제 인사들이 서로 연계를 가졌던 것은 과거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와 같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된 것은 86년 하반기에 들어서였다. 헝가리 시민봉기 30주년을 기념하는 이 해 바르샤바조약국소속의 자유운동가 1백25명이 한자리에 모여 상호단합의 기틀을 다졌었다.
이들은 그후 기회 있을 때마다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행동을 함께 해 왔고 지난해에는 바르샤바와 부다페스트에서 자유운동가회의를 연바있다.
이들의 결속을 눈으로 확인시킨 동구제국주요도시 일제시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권운동그룹인 「헌장 77」이 주도했다.
이 그룹은 지난해 11월 루마니아의 브라소프시에서 발생한 노동자봉기에 대한 보고서에서 루마니아사태는 현 「차우셰스쿠」 대통령에 맞선 최대의 항의였으며 루마니아집권세력은 권력유지를 위해 동구제국가운데 가장 억압적인 안보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폭로한바 있다.
동구제국에서의 군중시위를 당국이 경찰력 등을 동원하여 강제해산 시키거나 주동자들을 체포하지 않았다(폴란드는 예외)는 사실은 이들 나라의 시민운동이 서서히 변화해 가는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보인다.
같은 공산국가일지라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동구권국가에서는 가장 폐쇄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루마니아 체제에 대해서 연대감을 표시했다는 것은 관심을 끄는 일이다.
이러한 연대시위를 다른 동구위정자들이 탄압하지 않고 눈감아 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통제의 고삐를 늦추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동서해빙의 분위기 속에서 동구와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한국으로서도 이러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용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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