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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위로, 스피키지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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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호 30면

[꽃중년 프로젝트 사전] ‘마시다’

누구나 독한 술 한 잔이 생각날 때가 있다. 사업 8년 차 때쯤으로 기억한다. 회사의 존재 위기가 느껴진 힘든 일을 겪은 그날,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집 앞 포장마차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렸을 적 드라마에서나 보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들이 많은 생각을 담은 표정으로 깡소주를 마시던 장면처럼, 그때 내 앞에도 소주 한 병과 투명한 소주잔이 놓여 있었다.

한 모임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선배 한 분이 “요즘 중년은 경험(?)을 마신다”라며 은밀한 남자들의 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선배는 야근이 많았던 몇 년 전부터 퇴근할 때 집 앞 조용한 싱글 몰트바를 혼자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신이 피로한 날, 술 한 잔 떠오르는데 친구나 후배를 불러내기도 딱히 어려운 시간, 선배의 몸이 자연스럽게 찾아 간 바(Bar)는 일명 비밀스러운 콘셉트를 내세우는 스피키지바(speak-easy bar)다.

혹시라도 이쯤 해서 예쁜 여성이 술을 따라주는 공간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아재’다. 스피키지바는 1920~1930년대 대공황 여파로 미국 정부가 금주령을 내렸을 때 몰래 술을 팔던 밀매점에서 유래한 말이다. 블라인드 타이거(blind tiger) 또는 블라인드 피그(blind pig)라고도 불린다. ‘스피키지’란 이름도 손님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한다는 의미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지 않고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은밀한 가게를 통칭하는 말이다. 꽃집 등으로 위장하거나 간판이 없고 출입구가 숨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스타일의 바는 우리나라에서도 혼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프라이빗하게 즐기는 문화 공간이 되고 있단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단골바에 대한 환상, 익숙한 얼굴의 바텐더에게 “늘 마시던 걸로”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우수에 찬 표정을 짓는 중년. 영화에서나 보는 장면 같지만, 중년들의 핫한 놀이터이자 작은 위로를 주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된 지 오래란다.

여기에서 묘미는 바텐더의 능력과 둘의 관계다. 단지 술을 내주는 사람으로의 존재가 아니라 술에 대한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가끔은 내밀한 속내까지, 좋은 대화상대로서의 파트너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비밀 아지트를 기꺼이 소개해 준 선배도 바를 찾는 이유로 장인 정신을 갖춘 바텐더들의 높은 수준을 가장 먼저 이유로 꼽는다. 나를 알아주고, 대화가 되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는, 친구 같은 관계는 덤이다. 위로와 안식이자 하나의 좋은 경험을 남기게 되는 바는 단지 술을 파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선배는 작년에 유명한 미인 정치인(미인임을 강조했다)이 프라이빗한 바를 소개해 가 본 적이 있다며, 또 다른 ‘블라인드 피그, 시가 바’에 대해 털어놓았다. 은밀한 장소가 궁금해진 모임 사람들은 그날 바로 선배가 소개한 바를 찾아갔다. 싱글 몰트와 시가 향기, 그리고 여유에 취해본 베스트 송년회. 그야말로 반전의 공간이었다.

바는 아니었지만 시끌벅적한 포장마차에서 혼자의 시간을 가져보았던 그 경험 이후 고독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는, 한 잔의 위스키에서 위로받는 ‘중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과장일까.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단골 바 하나쯤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중년의 삶에 작은 위로가 되어 줄 테니.

허은아
(주)디 아이덴티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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