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꾼 명단공개 안 하나 못하나|예정일 2주나 넘긴 국세청 속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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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부동산투기꾼의 명단을 공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국세청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국세청은 당초 구정인 지난 18일 직전에 질이 나쁜 땅 투기꾼의 명단을 공개, 사회의 심판을 받게 하겠노라고 공언한바 있지만 예정일보다 2주일이 지난 현시점까지 공개여부조차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 고민의 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쉽사리 가늠케 하고 있다.
국세청이 그동안 조사결과를 종합, 질이 극히 좋지 않은 투기꾼의 명단을 만천하에 공개키로 방침을 정한 것은 전국적으로 열병처럼 번져 나갔던 부동산투기 붐에 찬물을 끼얹고 투기심리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과거 양담배흡연 근절대책 때도 명단공개라는 극약처방이 큰 효험을 본적이 있었다.
명단공개에 의한 사회적 제재는「여론재판」을 감내 해 낼만큼 강심장이 있겠느냐는 인간적인 약점을 노린 작전이다.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사회에서는 약효가 먹히게 마련이다.
작년 하반기이후 특히 금년 들어서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한 부동산 투기 붐 때문에 국세청의 고위당국자 입에서 명단공개라는 대책발표가 나왔지만 그후 건설부의 토지거래허가제 실시발표 등 이 겹쳐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잇달아 정부의 부동산투기봉쇄 대책이 발표되자 전국을 휩쓸던 부동산 투기 붐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그라들었다.
서해안 일대를 누비던 자가용 투기 족 행렬은 뚝 끊겼고, 문전성시를 이루던 개발지역의 복덕방들은 하나둘 셔터를 내렸다.
어째 든 부동산투기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정부의 목적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국세청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투기는 잠들었는데 굳이 과거지사를 들추어내「매질」을 다시 할 필요가 있느냐는「인정 논」이 대두된 것이다.
반면 명단공개를 고집하고 있는 쪽은「명분론」을 내세우고 있다. 비록 목적이 달성됐다고는 하지만 국민들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명단공개 약속의 장본인이 다름 아닌 국세청의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성용욱 국세청장은 지난7일 KBS-TV회견에서『부동산투기를 발본색원, 국민들에게 한치의 의혹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부동산투기꾼의 명단을 실명으로 공개하겠다』고 밝혔었다.
성 청장은 이를 위해 그동안 작년 1월 이후 전국에서 이뤄진 1백70여만 건의 부동산 거래를 1차 조사한 결과 이중 투기혐의가 짙은 1백15명과 83개 기업을 적발했다고 덧붙였다.
국세청은 이후 조사를 보다 철저히 하기 위해 전국 1백22개 세무관서 직원의 70%에 이르는 1만여 명을 총동원했다.
이 때문에 지난15일 있을 예정이었던 7급 이하 직원들의 정기인사는 조사가 마무리 될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더구나 이 인사는 본래 작년9월에 이뤄져야 했는데 대통령선거바람에 반년 가까이 미뤄져 직원 등의 불만이 높았었다.
이런저런 점을 감안, 국세청은 이 인사날짜를 3월4일로 잡아 놓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명단을 공개할 토지 투기 자들에 대한 조사는 사실상 끝난 상태이고 실제 최종 조사결과 보고날짜는 3월2일로 잡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단공개는 물론 공개여부 조차 불투명해지자 특히 말많은 증시주변에서는 이러쿵저러쿵 루머가 난무하고 있다.『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외부의 압력 때문에 결국 발표하지 못할 것이다』『모모 유력 인사, 모모 대기업주들이 포함되어 있다 더 라』등등.
현재 부동산투기조사는 본 청 직세 국과 조사 국의 두 군데서 총괄하는 2원 체제.
직세 국은 지방청의 조사결과를 보고 받고 있고, 조사 국은 세무조사를 병행해야 할만큼 비중 있는「큰 건」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특히 조사 국에는 일부 재벌기업관계자는 물론 몇몇 국회의원들까지 출입이 잦아 증시에 나도는 풍문을 더욱 부채질하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투기조사에 대한 외풍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조사대상이 광범해 조사가 지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세청직원들은『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서울동부세무서의 거액뇌물수사사건으로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것도 괴로운데, 투기꾼 명단공개 마저 흐지부지 끝나면 국민의 대 정부 신뢰도도 떨어지게 될 것 아니냐』며 걱정하고 있다. <이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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