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걸의학전문기자의우리집주치의] 알코올 중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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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독자 여러분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많은 한국 남성이 알코올 중독자란 사실부터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점에선 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현대 정신의학은 질병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정상적 사회생활의 영위 여부를 따집니다. 주관적 증세나 객관적 검사 결과보다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잘 지내는지 여부가 훨씬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알코올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술을, 얼마나 자주 마시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의 진단 기준 중 어떤 항목에도 주량과 관련한 내용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음주 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은 행위를 했는지 여부입니다. 소량이라도 술 때문에 가정 불화가 생기거나 음주운전.폭력 등 불법행위로 말썽을 빚었다면 알코올 중독에 해당합니다. 반면 역설적이지만 매일 폭탄주 10잔을 마시더라도 사회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알코올 중독이 아닙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술자리 실수에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행패나 난동도 술자리에선 눈감아 주기 일쑤입니다. 오히려 장관 프로필에'두주불사(斗酒不辭)'란 용어가 마치 큰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개선해야 할 잘못된 관행입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술 마신 뒤 비틀거리며 고성방가하는 것조차 경찰에 연행될 수 있는 범죄행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알코올은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킵니다. 음주 후 성욕이나 공격욕 등 본능적 충동이 발현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성과 교육의 힘에 의해 알코올의 작용도 통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많은 분이 술 취해 한 말은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숨기고 싶거나 숨겨야 하는 말은 아무리 술에 취해도 발설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전쟁 시 포로에게 기밀을 캐내기 위해 알코올을 정맥주사하면 될 일을 굳이 고문까지 할 이유가 없겠지요.

결론적으로 알코올은 평소 이성의 통제가 약했던 분야를 공격할 뿐 만취했다고 누구나 실수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물론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십니다. 그러나 취했다고 면죄부가 부여될 순 없는 일입니다. 나쁜 술버릇을 지닌 사람에겐 같이 술을 마시는 동료나 선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절대 관용을 베풀어선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따끔한 질책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정신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인지행동치료는 물론 술을 마시면 일부러 몸이 아프도록 만들어 술을 끊게 하는 약물치료도 있습니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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