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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수채화로 서울 풍경 슥슥, 잘나가는 건축가의 이중생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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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진우 정림건축 대표가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을 그린 펜 수채화. 서울시가 발행하는 달력에서 그가 그린 서울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임진우]

임진우 정림건축 대표가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을 그린 펜 수채화. 서울시가 발행하는 달력에서 그가 그린 서울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임진우]

그는 매일 아침 서울의 마을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무실 책상엔 크고 작은 붓 10여 개가 놓여있다. 출장을 갈 때는 가장 먼저 물감을 챙긴다.

임진우 정림건축 대표 #이화마을·한양도성·장수마을 … #옥상 위 빨래, 장독대까지 생생 #“주택 지붕들이 만든 선 아름다워” #서울시 달력에 4년째 재능기부도

작가나 화가의 일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직업은 건축가다. 서울의 풍경을 펜 수채화로 담아내는 임진우(55·사진) 정림건축 대표를 만났다.

임진우 정림건축 대표

임진우 정림건축 대표

그는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였다.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종로구의 이화마을·한양도성·동숭동·인사동, 성북구 장수마을…. 바람에 날리는 옥상 위 빨래, 뒤엉킨 전선줄, 나란히 놓인 장독대까지 생생하게 포착했다.

서울이 담긴 이 그림들은 서울시의 2015~2018년 달력에 실렸다. 임 대표는 4년째 서울시에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주로 서울의 옛 모습을 간직한 곳들을 그린다. “녹슨 대문을 보고 ‘낡았다’고 생각하지만 억지로 만들 수 없는 세월이 녹아있어요.”

그는 학창시절 화가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건축학과에 진학했다. 5년 전,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보고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고 했다. 임 대표는 “건축은 구조적인 한계가 있지만, 그림의 세계에선 뭐든 가능하다. 그림은 내게 해방구와 같다”고 말했다.

막상 펜을 들고 보니 제일 그리고 싶은 건 역시 건축물이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그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촬영해 와 틈틈이 사진을 보면서 그림을 그린다. “건축가로서 아직은 옛 풍경이 남아있는,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달라질 서울의 모습을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겼어요.”

그가 펜으로 가장 공들여 그리는 부분은 오래된 주택 수십 채의 서로 다른 높낮이다. 그는 이 높낮이가 만드는 ‘선’이 서울 전체를 아름다운 건축물로 만든다고 했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를 다녀 봐도 서울처럼 건축물과 자연 경관이 적절히 어우러진 수도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국내외 출장을 다니면서 감상한 도시의 모습도 화폭에 담아내 지금까지 미국·일본·러시아 등 20여 개 나라의 50여 개 도시를 그렸다.

모든 도시를 직접 보고 그려왔지만 최근 딱 한 곳은 사진만을 보고 그렸다. 북한의 평양이다. ‘2017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의 도시전 가운데 하나인 ‘평양전’의 포스터를 그가 그렸다. 그는 “지금은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로 남북 관계가 경색돼 있지만 언젠가 남북한 건축가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 그림을 즐기는 그는 요즘도 건축물의 설계도를 스케치북에 그린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설계도를 그려야 건축물에도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다”는 생각에서다.

건축가로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청와대 제3별관, 신촌 세브란스병원(2006년 서울시 건축상 수상), 한국야쿠르트 본사 사옥, 한국가스공사 사옥 등이 있다. 1986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프로젝트 디자이너를 거쳐 2015년 대표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가 꼽은 자신의 대표작은 서울 서대문구의 ‘봉원교회’다. 한적한 주택가 언덕을 깎아내지 않고 돛단배 모양을 한 교회를 지었다. 그는 유행을 쫓기보단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강한 건축’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지난 9월엔 자신의 손 그림들을 모은 개인전 ‘임진우의 감성풍경화첩’을 열었다. 그의 작품들로 구성된 내년도 서울시 달력도 완성됐다. 은퇴 후 그의 꿈은 ‘그림 그리는 여행 칼럼니스트’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림 무료 강의도 열고 싶어한다.

“수채화를 그린 후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것보다 마음을 담은 일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그는 “오히려 그림이 나의 삶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글=임선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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